'초자연적 탐정 영화'로 부활한 애거사 크리스티…'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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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출신 케네스 브래너 연출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의 케네스 브래너(1960~)는 20~30대엔 주로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연출가로 활동했다. 20대 초반부터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SC) 배우로 활약하다가 주역을 맡은 셰익스피어 연극 ‘헨리 5세’(1984)로 명성을 얻었다. 이 여세를 몰아 1989년 직접 제작하고, 연출과 주연까지 해낸 영화 ‘헨리 5세’가 호평을 얻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국내에는 브래너가 직접 연출하고 주연한 ‘헛소동’(1993)과 ‘역대급 이아고’연기를 펼친 올리버 파커 감독의 ‘오델로’(1995) 등이 개봉되면서 존재감을 알렸다.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 3부작 시리즈
영화 특성 맞게 각색한 연출 돋보여
티나 페이·양자경·주드 힐 등 호연
브래너는 이후 ‘해리포터’ 시리즈의 록하트 역과 ‘토르 : 천둥의 신’ 감독 등을 맡아 할리우드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덩케르크’ ‘오펜하이머’등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배우로도 잘 알려졌다. 그런 그가 최근 관심을 쏟는 작가와 배역은 세계적인 영국 추리 소설가인 애거사 크리스티와 크리스티 작품의 해결사인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다.오는 13일 개봉하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A Haunting in Venice)’은 브래너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과 ‘나일강의 죽음’(2022)에 이어 선보이는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 기반의 추리극이다. 두 전작과 마찬가지로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인 20세기 폭스와 합작해 브래너가 직접 연출하고, 주인공 포와로 역을 연기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나 장르적 특징은 전작들과 사뭇 다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나일강의 죽음’은 크리스티 소설 중 잘 알려진 작품들로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작품이 이미 존재했다. 브래너는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일부 추가하고 자기 감각과 개성을 살려 만들었지만, 원작이나 기존 작품의 틀과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리메이크’했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의 원작은 크리스티의 1969년 발표작 ‘핼러윈 파티’다. 두 전작의 원작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이다. 이전에 TV 시리즈물 이외에 극장 개봉 영화 등으로 제작된 적도 없다. 두 전작의 각본을 썼던 마이클 그린은 이번엔 창작력을 십분 발휘했다. 영화적 재미와 특성에 맞게 각색을 많이 했다. 배경부터 원작은 영국의 한 시골 마을이지만 영화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이탈리아 베니스다.두 전작에서 포와로가 해결해야 할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장소가 유럽을 가로지르는 특급열차나 나일강을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었다면 이번엔 유령이 출몰한다는 으스스한 고택(古宅)이다.
이 영화는 합리성에 기반한 추리극답지 않게 '초자연적 스릴러'를 표방하는 것도 전작들과는 다른 점이다. 오랜 탐정생활에서 은퇴한 후 베니스에서 평범한 삶을 즐기던 포와로에게 오랜 친구이자 베스트셀러 추리 작가인 올리버(티나 페이 분)가 찾아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심령술사(영매사) 레이놀즈(양자경)의 실체를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핼로윈 파티가 열리는 한 고택의 주인인 드레이크(켈리 라일리)의 초대로 레이놀즈 주관으로 1년 전 죽었다는 어린 딸의 유령을 소환하는 의식에 참석한 포와로와 올리버. 의식이 끝난 후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유령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포와로의 눈에 유령의 모습이 비친다. 그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전작들에 비해 축소된 공간적 스케일과 그로 인해 떨어지는 역동성을 ‘유령’이 불러오는 공포와 긴장감이 만회하고도 남는다. 브래너가 연출하고 출연한 ‘포와로’ 영화 중 극적 짜임새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 심령술사로 등장하는 양자경이 극 중 적은 비중과 분량에도 강렬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브래너의 자전적인 영화 ‘벨파스트’에 나왔던 제이미 도넌과 아역 배우 주드 힐이 부자(父子)로 등장해 좋은 연기를 펼친다.영화 마지막 장면에 ‘베니스 유령’ 사건을 계기로 포와로가 탐정 일을 재개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브래너 감독·주연의 ‘포와로’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