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식량난 속 5년 차 맞은 북한 미사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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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장 딜레마에 갇힌 북한20여 년 전 베트남 하노이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베트남에 북한 정권 2인자가 찾아와 쌀 50만t 원조를 요청했다. 평상시 같으면 북한이 응당 한국이나 미국에 손을 내밀었을 것이나, 그즈음 제1차 서해교전 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긴장에 빠진 시기였기 때문에 부득이 같은 최빈국인 베트남에 식량 원조를 호소한 것이었다. 매년 200만t의 쌀을 수출하던 베트남은 재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요청받은 양의 1%에 불과한 5000t의 쌀을 지원했다.
北 주민들 생존 위기로 몰아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前 외교부 북핵대사
베트남전쟁 때 공군 조종사까지 파병한 ‘혈맹’인 북한에 대한 베트남의 이 같은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그래서 평소 가까이 지낸 베트남 공산당 고위 간부를 찾아가 연유를 물었다. 그는 자구 노력이 없는 나라는 도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베트남은 개혁개방 이전까지 1모작 쌀농사를 지었고 식량 부족으로 매년 대량의 쌀을 수입해야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도이머이(개혁개방) 정책으로 모든 농민에게 농지를 나누어 준 이후엔 3모작 농사로 쌀 생산량이 급증해 매년 수백만t을 수출하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제도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북한의 공산주의식 집단농장 제도 때문에 식량난이 발생한다는 취지였다.그로부터 4년 후 북한 식량난의 연원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미·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 신포에서 원전 2기를 건설하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뉴욕 사무국에서 근무한 필자는 한두 달마다 신포 공사장을 방문했다. 그런데 항구에서 공사장까지 신포평야의 비포장도로를 지나며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농번기임에도 아무도 일하지 않는 신포평야의 논과 들, 물이 없어 갈라진 논바닥, 시들어 죽어가는 벼들이 보였다. 왜 아무도 일을 안 하는지 물으니 다들 자기 집과 산꼭대기의 텃밭에만 정성을 들인다는 얘기였다. 공산주의의 가혹함도 인간의 본성을 개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로 북한의 경제 여건은 더욱 쇠락했고, 인도적 지원 외의 모든 대북한 원조가 금지됐다. 그럼에도 김정은 치하의 북한 경제는 수년 동안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 평양에는 많은 현대식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식량난도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 이는 다분히 북한 당국의 방관 속에 호황을 누린 400여 장마당(종합시장) 덕분이었다. 그러나 장마당 경제가 확대되자, 국가 통제력 약화를 우려한 공안의 탄압이 거세졌다. 마침 코로나 봉쇄로 장마당은 몰락의 길을 갔다.
사회주의적 식량 배급도 자본주의적 장마당도 없는 세상에서 북한 주민들은 다시 생존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식량난 얘기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북한 주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한 돈을 연일 ‘미사일 쇼’로 날려 보내는 북한의 해괴한 풍속도는 끝날 기색이 없다. 2019년 제2차 미·북 정상회담 결렬 직후부터 시작해 벌써 5년 차에 접어들었다. 하기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핵무장의 딜레마에 갇힌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외에 더 무엇이 있으랴.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는 북한의 자해적 미사일 쇼는 출구도 퇴로도 상실한 북한 체제가 좌절과 울분 속에 내지르는 비명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