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반성문을 읽다_청마와 정운의 사랑이야기

[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 유치환(柳致環) / 예루살렘의 닭 / 산호장(珊瑚莊) / 1953년 4월 20일 발행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그것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끄적거린 글을 시(詩)랍시고 풀어놓고는 시화전이다 낭송회다 하며 몰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때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이란 시인을, 아니 그의 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도 그렇게 껍데기나 다름없는 시에 대한 환상을 그러잡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도저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선생님들이 학습용으로 부여하는 의미 속에서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유치환.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어느 날, 제목조차 아스라한 시선집(詩選集)에 실린 <생명(生命)의 서(書)>라는 작품을 읽고 난 후 나는 ‘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예술인지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썼던 나의 그것들을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로 시작하여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오직 알라의 신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를 지나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로 끝나는 작품 <생명의 서>는 그야말로 숙연하고도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어려운 한자(漢字) 투성이 시어(詩語)들의 뜻도 잘 모른 채 그저 시 자체의 장중함에 압도당한 터였다.

유치환 시인의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청마(靑馬)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신으로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둘째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의 동생이다. 열한 살 무렵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했다. 이 무렵 형 유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서 졸업한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했다. 당시 시단(詩壇)을 휩쓸었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유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다가 1931년 <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1937년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같은 해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초기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 등 55편이 실렸다. 1945년 10월부터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으며, 1951년 11월 통영여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는 등 줄곧 교단에 섰다. 안의중학교와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 교장을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7년 2월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예루살렘의 닭_앞표지
유치환 시인의 작품을 담은 것으로 생전에 발행된 책은 모두 14종이다. 그리고 이들은 시집 혹은 수필집으로 분류되는데, 1953년 초판이 발행된 <예루살렘의 닭>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어떤 이는 시집으로, 또 어떤 이는 수필집으로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가로 128mm, 세로 185mm 크기에 모두 101쪽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그 표지에 ‘수상록(隨想錄)’이라고 표기되어 있기에 혼란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면면을 보나 일반적인 독자들의 눈으로 보나, 나아가 이후의 시집에서 기존 시집의 목록을 밝혀 놓은 것―예컨대 1964년 11월에 발행된 시집 <미루나무와 南風(남풍)> 간기면을 보면 <예루살렘의 닭>이 유치환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집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앞표지를 보면 짙은 감색과 붉은색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붉은색 바탕에 가로글씨로 제목 ‘예루살렘의 닭’이, 세로글씨로 ‘隨想錄(수상록)’이란 글자가 제목보다 더 큰 글씨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역시 세로글씨로 ‘柳致環(유치환) 著(저)’라는 글씨가 표기되어 있다. 모든 표지 글씨는 활자체가 아닌 손글씨로 추정된다. 뒤표지 역시 같은 주조의 색상이 그대로 이어져 있으며, 한가운데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형상인 듯한 모습의 상징 디자인이 새겨져 있다.
예루살렘의 닭_속표지
표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위쪽에 겉표지와 같은 서체의 제목과 함께 하단에 활자체로 ‘靑馬隨想錄(청마수상록)’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아래에 독수리 문양의 디자인이 인쇄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珊瑚莊(산호장) 刊(간)’이라고 새겨져 있다. 속표지를 넘기면 헌사(獻詞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세로글씨로 ‘隨想錄 - 이것을 T에게 드린다 -’고 분명하게 적혀 있지만, T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다음 페이지를 열면 목차가 나오는데, 일반적인 ‘목차’ 또는 ‘차례’라 하지 않고 ‘內容(내용)’이라고 한 것이 눈에 띈다. 목차를 지나면 오른쪽에 ‘意匠(의장) 張萬榮(장만영)’이란 표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 페이지에는 이 책의 제목이 다시 한 번 속표지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비로소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 관한 의문이 풀리는 단서가 등장한다. ‘의장(意匠)’이란 말은 일본식 표기로 이른바 ‘디자인’을 뜻하는 말로서 곧 ‘장정(裝幀)’이란 말과 같으며, 따라서 이 책의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한 사람이 바로 ‘장만영’이라는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만영’이란 이름은 이 책의 맨 뒤에 나오는 간기면의 발행인 표기에서도 볼 수 있다. 결국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은 시인 장만영(張萬榮, 1914~1975)이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장만영 시인은 황해도 연백군 배천(白川)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배천온천호텔’을 경영한 식민지 기업인이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호텔이 북한지역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월남하여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지만, 호텔 경영 시절에는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교류 공간을 제공한 후원자였다.

국내 온천 중에서 수온이 80도로 가장 높았다는 배천온천은 당시만 해도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특히 호텔사업뿐만 아니라 온천수를 이용한 온실을 만들어 포도, 멜론, 오이, 장미, 제라늄, 선인장 등 과일과 채소 및 화초 등을 키웠다. 이렇게 수확한 작물들은 서울의 고급호텔과 요정이나 식당으로 팔려나갔다. 장만영 시인의 작품 중에 유독 ‘온천(溫泉)’ ‘온실(溫室)’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아울러 <달·포도·잎사귀> 같은 대표작도 온천수를 이용한 온실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배천온천에는 명사(名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당시 문인과 예술가들을 후원했기에 예술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상(李箱, 1910~1937)과 기생 금홍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진 무대도 다름 아닌 배천온천이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상황이 급변한다. 배천온천이 있던 배천읍 뒷산에 38선이 그어지고 배천온천호텔은 미군 1개 중대가 주둔하는 사령부로 차출됐던 것이다. 미군정이 끝날 무렵 북한군의 습격으로 배천경찰서가 약탈당하고, 이 지역을 공산당이 장악하는 과정에서 온천호텔마저 모두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장만영 시인은 가족과 함께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월남을 하게 된다. 장만영 시인이 월남 후 자리 잡은 곳은 지금의 서대문구 평동이었다. 여기에 ‘산호장’이란 출판사를 열고 문고판 ‘산호문고’를 펴냈다. 김기림 시인의 <기상도>와 조병화 시인의 <버리고 싶은 유산> 등이 당시 ‘산호장’에서 출판한 책들이다.
예루살렘의 닭_본문도입부
다시 책 <예루살렘의 닭>으로 돌아가 다음 페이지를 보면 오른쪽에 “새벽 닭이 울 때마닥 보고 싶었다”라는 문구와 함께 ‘정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 유치환 시인이 서정주 시인과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정주’는 곧 ‘미당 서정주’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비로소 왼쪽 페이지부터 첫 번째로 '하늘'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또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간기면을 보면 1953년 4월 15일에 ‘협동문화사’에서 인쇄하고, 같은 해 4월 20일에 ‘산호장’에서 발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천 부 한정판으로 냈으며, 당시 책값은 80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의 제목도 그렇거니와, 표제작의 내용 또한 성경 곧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치환 시인은 기독교인이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유치환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기독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을 여럿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담긴 두 편의 시는 아예 성경 구절을 부제로 달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그 의미에 대해 쓴 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당시 유치환 시인은 성경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된 표제작 '예루살렘의 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의 닭_본문
오늘도 너는 嘲笑(조소)와 모멸로서 침 뱉고 뺨 치며 僞善(위선)이 善(선)을 凌辱(능욕)하는 그 不正(부정) 앞에 오히려 外面(외면)하며 回避(회피)함으로서 惡(악)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 城(성)에 닭은 제 울음을 기일게 홰쳐 울고, 내 또한 無力(무력)한 그와 나의 卑屈(비굴)에 對(대)하여 죽을상히 사모치는 분함과 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써 눈물로써 베개 적시우노니.
― '예루살렘의 닭' 전문

이 시는 자신의 그간의 삶에 대한 반성문으로 읽힌다. ‘너’는 예루살렘의 닭인데 무력하기도 하지만 악에 가담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의 닭은 예수 활동 당시 군중심리에 휩싸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라고 외쳤던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리킨다. 부정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악에 가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예나 지금이나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들이 많다고 시인은 개탄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시가 시집의 전체 내용을 포괄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의 무력과 비굴을 자책하면서 베개가 젖도록 울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런 시를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유치환 시인이 굳이 기독교적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를 반성한 연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유치환 시인은 1929년, 당시 경성중앙보육학교 출신으로 통영에서 보육원에 근무하고 있었던 권재순(權在順)과 결혼하여 슬하에 3녀를 두었다. 그럼에도 ‘청마의 사랑’이라고 하면 ‘이영도’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 유치환과 그녀의 만남은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처음 만날 당시 유치환은 서른여덟 살의 기혼자로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였고, 이영도는 서른 살로 같은 학교의 가사교사였다. 이영도는 스물한 살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딸 하나를 키우며 오직 시조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알고 보면 이영도는 청도(淸道)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유치환 시인이 극작가로 유명한 유치진의 동생이듯 이영도는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의 누이동생이다.
예루살렘의 닭_헌사
그러고 보면 1945년은 국가적으로나 이영도 시인 개인적으로 이러저러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인 듯하다. 1945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대구여자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로 옮겨 1953년 5월까지 근무했다. 그때 같은 학교 교사였던 청마의 애틋한 편지 공세가 시작될 무렵이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대구에서 발행되고 있던 시조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와 '바위'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빠 이호우 시인의 영향이 컸을 테지만, 같은 학교에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화가 전혁림(全爀林), 시인 김춘수(金春洙)와 김상옥(金相沃)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근무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 시기에 폐침윤(폐질환의 일종)에 걸려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했고, 그동안 믿어왔던 불교에서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통영중학교, 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을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청마 사후(死後)인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글을 쓰고 대학에 출강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69년에는 청마 서간집의 저작권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문학상(丁芸文學賞)을 제정하기도 했다. 시조집으로는 1954년에 발행한 <청저집(靑苧集)>을 비롯해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 <석류>(1968)가 있고, 유고 시조집 <언약(言約)>(1976)이 있다.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고 유고 수필집으로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1976)이 있다.

이영도는 처음에는 수예점을 운영하다 광복되던 해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고, 유치환은 만주로 떠돌다 광복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이렇게 같은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정운에게 청마는 1946년 어느 날부터 거의 매일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마는 이미 처자식을 두고 있는 몸이었으니, 세상에 드러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랑은 결코 아니었다. 1967년 2월 13일 59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청마는 20여 년 동안 정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고, 정운은 그 편지를 모조리 보관해 두었다. 청마는 매일 새벽에 일기를 적듯 정운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편지로 썼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닭_목차
다음과 같은 시 '행복'은 기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거니와, 훗날 선남선녀들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작품으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전문

청마는 먼저 '파도' 또는 '그리움'으로도 불리는 작품으로 정운에게 향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답답함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라고 절절하게 읊는다. 하지만 정운의 마음을 굳게 닫아놓은 빗장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마다 날아드는 편지 속에 담긴 애틋한 시편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정운의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1954)에 실렸던 '무제1'은 청마의 절절한 마음 못지않게 아팠던 그의 심정을 담은 작품으로 읽힌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렇고 보면 청마와 정운의 정신적 사랑은 시작됐으나 현실적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정운의 표현처럼 ‘민망하고’ ‘서글프고’ ‘하염없이’ 안타깝기만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닭_목차
어쨌든 1946년부터 20여 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부친 편지는 무려 5천여 통이었다. 거의 매일 그날그날의 마음을 담은 연서(戀書)를 보낸 셈이다. 나중에 정운은 청마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서 200통을 추려 1967년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어 발행함으로써 세상에 그들 비운의 사랑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또,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 발표한 시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탑' 전문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그리움' 전문

이처럼 안타깝고 애틋할망정 이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오늘날의 잣대로 본다면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이영도와의 사랑은 유치환의 시 세계를 넓혀 주었고,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영남일보, 김봉규 기자, 선비들의 사랑이야기.19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유치환과 이영도(下)」, 2017.06.29.)라고 했는데, 이 또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다시 <예루살렘의 닭> 표제작 때문에 생긴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유치환 시인이 굳이 기독교적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를 반성한 연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당시에 청마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연모(戀慕)의 실체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르는 비윤리적인 것이라는 데서 오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리하여 드러내놓고 사모의 정을 불사를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빠져드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반성하고자 몸부림쳤다면, 나아가 이를 종교적 행태에 빗대어 숭고한 가치가 있는 ‘반성’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면? 일개 독자의 시선으로 보건대, 그렇게 해석해도 무방한 작품이 아닐까……. 당시 정운의 심사가 어땠는지 알 길 없으나 또 다른 정운의 이야기는 다음에 더 보태기로 하고 이만 글을 맺는다.
미루나무와 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