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하면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우리에게 바치는 조의

[arte] 심완선의 SF라는 세계

링 마, [단절]
링 마, 단절 (사진=알라딘)
장르를 말하기에 애매한 작품들이 있다. 특정 장르의 핵심적인 재미를 구현하는 대신 그 변두리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다. 링 마의 [단절]에는 좀비가 나오지만 좀비물에 으레 기대할 법한 긴장은 없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현재와 같은 세상이 멸망하는 이야기이지만, 대재앙 이후를 다루는 포스트아포칼립스 SF의 구성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쩐지 기억에 남는 작품이기도 했다.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나 자기파괴적인 생활을 지속해온, 그래서 미래와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현대인의 감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인구 증대와 자원 고갈, 생태계 파괴로 인해 예측불허의 재난이 일상화된 세상 등은 지금의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와 콘크리트로, 만질 수 있지만 먹지 못하는 물건으로 가득하다. [단절]의 좀비는 사람을 습격하지 않는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좀비처럼 의식을 잃고 움직이지만 공격성을 보이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과거의 습관적인 행동을 덧없이 반복한다. 그들은 자아 없이 소모적으로 움직인다. “수명이 다한 컴퓨터의 마우스를 움직이고, 망가진 세단의 스틱을 조종해 운전하고, 텅 빈 식기세척기를 가동하고, 죽어 버린 화초에 물을”(49) 준다.

비록 음식이 없더라도 빈 접시를 달그락거리며 식사를 차리는 행동을 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라도 LP를 재생하고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식료품은 썩고 집에는 파리가 들끓지만 그들은 이미 자아를 잃었기에 개의치 않는다. 말없이 생전의 행동을 유지하는 모습은 마치 깊은 향수에 빠진 듯 보이기까지 한다.

작중의 생존자 일행인 ‘밥’은 뱀파이어 영화와 좀비 영화의 차이를 설명한다. 뱀파이어 서사에서 위험은 악당이 어떤 인물인지에 달려 있다. 뱀파이어 서사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비는 집단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좀비 서사는 어떤 개인이 가진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힘에 관한 이야기”(51)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습격해 올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좀비 서사로서 [단절]이 보여주는 힘은, 인간이 일구어낸 도시가 지닌 거대한 원심력이다. 소설의 주인공 ‘캔디스’는 뉴욕에 사는 도시생활자지만 미국에 완전히 소속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이민 2세다. 그녀는 부모 세대가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얻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예민하게 포착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크리니크 로션’이나 아버지의 회사가 위치한 마천루로 드러나는, 익명의 소비자라는 위치다.

캔디스 역시 뉴욕의 자본주의 한복판에 있다. 캔디스의 일은 타국의 값싼 노동력을 더욱 저렴하게 조절해 생산자와 연결해주는 것이다. 선 열병이 등장하기 전이든 후이든 뉴욕과 홍콩 같은 대도시에는 엄청난 양의 물건이 있다. 휘황찬란한 이름을 지닌 명품 브랜드 가게가 포진해 있다. 저자는 캔디스가 보고 즐기고 소비하는 상품의 이름을 소설에 일일이 기술한다. 그 이름들은 질릴 정도로 많기에 무의미하게까지 느껴진다. 도시생활자의 모습은 열병에 걸린 좀비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도시는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며 그들을 휘두르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루틴을 반복하도록 만든다.
gettyimages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가 내놓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도시의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다. 도시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도시의 매장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도시의 소비세를 지불하는 것이다. 도시의 노숙인에게 1달러를 기부하는 것이다. (...) 또한 그런 시스템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대체 누가 세세연년 그런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살 수 있겠나?”(467) 소설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뉴욕에 살던 캔디스의 과거 이야기는, 선 열병 이후 뉴욕을 벗어난 생존자 일행의 이야기와 병행한다. 생존자 일행은 면역력이 있어서인지 병에 걸리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한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념을 지닌 나이 든 백인 남성의 지휘에 따라 ‘정화’를 행한다. 좀비가 된 사람들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동시에 그들의 머리에 무신경하게 총알을 박는 일이다.

생존자들은 약탈에 나설 때마다 기도를 올린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저희가 감히 취할 수 있게” 하면서 그 소유자를 만나면 “부디 그들에게 공평하고 자비로운 태도”(104)를 취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무해한 자들을 완전히 살해하는 일은 생존자들이 보기에 “인도적인 일”(120)이다.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것은 퇴화이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위선적이다. 캔디스는 끝내 생존자들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우리는 다르다’는 믿음과 달리, 그들이라고 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오히려 과거와 완전히 작별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던 캔디스 쪽이다. 그녀는 자신이 자란 장소로 향한다. 그곳에도 뉴욕처럼 쓰레기장이 된, 광활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캔디스가 작고한 부모님을 위해 공물을 태우는 부분이다. 캔디스는 홍콩에 머무는 동안 고인을 추도하는 의미로 공물을 태우는 아시아식 의례를 알게 된다. 홍콩 골목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비싼 지폐를 태우면 그만큼 망자가 풍족해진다며 장삿속을 내보인다. 이는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이기에 추도에 잇따라야 할 엄숙함은 도리어 퇴색한다. 하지만 캔디스가 자신의 장소에서 태우는 물건의 목록은 압도적이다.

“나는 아빠를 위해 조스 에이 뱅크의 정장과 그 정장에 어울리는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윙팁스 신발을 태웠다. 보다 편하게 입을 옷도 필요할 듯해서 제이크루의 옷도 몇 벌 태웠다. 에디 바우어의 플리스 재킷도 몇 벌 태웠다. 그러다가 사후세계라면 이미 몹시 뜨겁지 않을까 싶어서 땀을 흡수해 주는 나이키 운동용 셔츠도 몇 장 태웠다. 신간 도서도 몇 권 태웠다. 그 다음에는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의 서재 사진 면을 찢어내 태워 주었다. 최신 핸드폰과 버라이즌 선불카드도 하나씩 태웠다. 회색 재규어 XJ도 한 대 태웠다. (...)

엄마를 위해서는 루이비통 여행 가방과 펜디 핸드백을 태웠다. 혹시라도 알몸 상태로 배회하고 있을까 봐 구석진 곳에 숨어 있던 갭 티셔츠와 탤벗 드레스 몇 벌을 엄마가 좋아하는 크림색과 베이지색 계열로 골라서 태웠다. 늘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갖고 싶어 했기에 코트도 한 벌 골라 태워 주었다. 코치의 사첼백도 하나 태웠다. 엄마는 코치 브랜드를 정말 좋아했고, 코치 외에도 미국의 대표 브랜드들과 그런 브랜드의 깔끔한 제품을 좋아했다. 랄프로렌 슬랙스도 몇 벌 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 크리니크 드라마티컬리 디퍼런트 모이스처라이징 로션도 몇 통 태웠다. 크리니크에서 나온 제품이라면 모조리 태웠다. 크리니크 모이스처 서지, 크리니크 유스 서지, 크리니크 리페어웨어 레이저 포커스 등등”(174~175)

과연 사후세계에서 크리니크 로션이 필요할까?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에 속하게 된 죽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물건이 어울린다. 캔디스는 온갖 명품을 자신의 세상에서 망자의 세상으로 전송한다. 물건들은 불탄 순간부터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의미를 잃는다. 갖가지 물건의 이름이 무의미하게 나열되는 모습은 흥청망청 지속된 인간의 문명을 향한 추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우리에게 바치는 조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