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백을 받고도 자기만 생각한 '나르시시스트' 고흐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반 고흐, 「멜랑콜리」(1883)
이 그림은 1883년 12월 빈센트 반 고흐가 네덜란드 누에넨에서 그린 소묘 「멜랑콜리」다. 작은 교회가 멀리 위치하고 있으며 아래 오른쪽에는 한 여인이 교회를 바라보며 물끄러미 서 있다. 이 소묘가 ‘멜랑콜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고흐에 대한 이 여인의 외로운 사랑과 관련이 있다. 이번에 살펴볼 내용이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바람직한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상호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내가 너를 그리워하듯 너도 나를 그리워할 거야.’와 같은 사랑을 자연스럽게 기대한다. 하지만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가진다. 고르게 ‘사랑하기’보다 치우치게 ‘사랑받기’를 추구한다.고흐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으며, 자신을 사랑한 여인이 있는 이 그림에 대해 ‘멜랑콜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 고흐의 나르시시즘적 성격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한 여인을 향한 비뚤어진 사랑으로 나타난다.


유아적 나르시시즘

반 고흐, 「목사관, 누에넨」(1885)
나르시시즘은 유아기에 나타나는 심리적 상태다. 아직 발달 중인 인지 능력과 감성적 미성숙 때문에 유아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타인의 필요와 감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온통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선물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선물을 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선물 자체 또는 선물 받은 것에만 기뻐한다. 부모에 대해서는 그저 자신에게 선물해 주는 존재쯤으로 여기게 된다. 다행히 이와 같은 유아적 나르시시즘은 성장과 함께 부모와의 분리를 통해 대부분 사라지며 타인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성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부모와 분리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나르시시스트로 살아가게 된다.

그림에 보이는 교회는 고흐의 아버지가 새로 부임한 곳이었다. 고흐가 이곳에 왔을 때는 부모와 형제들한테서 차가운 분위기를 느꼈다. 집을 떠나 혼자 떠돌다 돌아왔으며 그동안 자기 생각과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런 자신에 대해 가족들의 냉랭한 시선이 느껴졌다. 가족들이 고흐와 함께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터라 자연스러운 과정이겠지만 고흐는 서른이 되어서도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이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어머니에 대해 이상한 집착을 보였다는 것이다.

어릴 때 아이들은 엄마와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며 엄마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엄마가 불편하거나 슬프면 자신도 같이 불안해지며, 엄마가 기쁘면 자신도 함께 웃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가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렇듯 유아기 때 집착한다면 모를까 사춘기를 겪은 이후로 성인이 되어서도 자녀가 유독 엄마에게 집착하는 것은 다양한 심리학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 고흐, 「집 앞에서 땅을 파고 있는 여인, 누에넨」(1885)
1884년 1월, 고흐는 어머니의 다친 상태를 알게 되면서 극한 히스테리를 보였다.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는 도중 미끄러져 허리뼈가 부러지고 깁스를 해야 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는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흐는 어머니가 영원히 움직일 수 없게 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나치게 예민한 행동을 보였다.

기록에 따르면 고흐는 직접 어머니의 침실을 1층 아버지의 서재로 옮겼다고 한다. 1층이 어머니가 거동하기에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가족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았다. 고흐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모든 시간을 어머니 곁에서 보냈다. 낮은 물론이고 밤이나 새벽에도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어머니를 살폈다.

고흐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고 싶었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려 어머니를 기쁘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화가가 된 자신의 그림으로 인해 웃음을 되찾는 모습에서 고흐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를 자랑스럽게 테오에게 전하며 작은 교회의 산울타리와 나무들을 그려 어머니를 기쁘게 한 경험을 공유했다. 이 시기부터 1885년 11월까지 고흐는 280점의 소묘, 수채화, 유화를 그렸다.그 결과 고흐는 어린 시절 그토록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엄마의 사랑을 이제야 얻게 되었다. 유아들은 엄마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 주면 줄수록 더욱 엄마에게 집착한다. 엄마가 어린 자기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무한한 안정감을 얻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유아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같기 때문에 엄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서른 살이 되어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안정감을 찾게 되었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집착하여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적 프로포즈


「멜랑콜리」에 등장한 여인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고흐가 어머니와의 관계로 안정감을 찾은 직후 함께 본격적으로 산책을 하게 된 여인이었다. 섬유공장 집 딸로 어머니, 그리고 세 자매와 함께 살았던 마르호트 베헤만(Margot Begeman)은 고흐가 화가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낀 데다가 어머니를 간호하는 고흐의 헌신적 모습에 감탄했다. 그녀는 고흐의 주위를 맴돌며 부끄러워하면서도 관심을 드러냈다. 동생 테오의 아내였던 요한나는 이 여성이 고흐와 함께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산책했다고 전했으며 금세 고흐에 대해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반 고흐, 「공원에서 산책하는 연인들, 아를」(1888년)
고흐는 8개월 동안 그녀와 만났다. ‘산책’이란 명목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고흐는 낯선 누에넨의 구석구석을 그녀와 함께했다. 「연인들」(1888), 「숲을 산책하는 두 남녀」(1889), 「산책하는 커플, 그리고 초승달」(1890)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고흐는 산책을 연애로 보는 시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여인과의 산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서로 옆집에 산다는 것과 특히 여인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안전장치로 여긴 것 같다. 그는 연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산책을 빙자한 데이트를 즐겼다.

잇따른 산책은 그림을 그린다는 구실로 포장되어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실없이 웃었고 급기야 반드시 해야 할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8개월 동안의 산책으로 마르호트는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며 고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고흐였지만 그 고백에는 둔감한 척하며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가을 산책을 즐겼다.

가을의 어느 날 한쪽만 일방적으로 키워갔던 사랑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여인의 가족은 고흐가 이전 여성 편력이 좋지 않은 데에다 산책 도중 가끔가다 신체적 접촉까지 가볍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둘의 교제를 반대하였다.

마르호트는 결혼에 대한 가족의 반대와 열두 살이나 되는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흐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신만의 일방적인 사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극도의 흥분에 빠졌다. 산책 도중 그녀는 갑자기 살충제 한 병을 들이켰다. 마치 소설에서 보바리 부인이 독약을 삼켰던 것처럼 경련으로 몸을 떨며 쓰러지게 되었다.

다행히 고흐가 그녀를 급히 병원으로 옮겨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마르호트는 고흐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동행하며 불쌍하고 늙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시골 병원을 방문했던 여인이었다. 목사의 타락한 아들 때문에 마음씨 곱던 처녀가 비극을 맞이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비난과 대중의 의심 속에 그녀는 마을을 떠나야 했다.
반 고흐, 「산책하는 연인들과 초승달이 있는 풍경, 생레미」(1890년)
고흐는 이 여인의 이름으로 한 점의 그림도 남기지 않았다. 단지 그녀와 관련된 그림에 ‘멜랑콜리’라는 이름을 남겼다. 고흐에게 마르호트는 우울함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우울증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헤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 향하던 리비도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 누적되어 발생한다. 이러한 감정은 자존감 하락, 무기력감, 불안감 등을 유발하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그렇다면 과연 그림에 있는 이 여인이 우울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그린 고흐가 우울한 것일까?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는 고흐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소묘의 제목으로 붙인 것 같다.

나르시시즘 또한 우울증처럼 리비도가 자신으로 향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니르시시즘의 리비도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남는다. 고흐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결핍된 사랑 때문에 열두 살 연상인 그녀에게 리비도가 향했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아이들이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며 엄마를 조종하려고 하듯이 고흐는 그녀와 주위 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그 단적인 예를 든다면 고흐는 귀찮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거나 심지어 마르호트가 가족 때문에 괴로워한 것을 상기하며 그녀의 자매들에게 폭력까지 썼다.

서른 살의 고흐에게 이런 행동이 가능한 것은 유아적 나르시시즘의 영향일 것이다. 고흐가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도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한 자기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연인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고흐에게 그녀는 어릴 적에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과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발생한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유아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고흐에게는 이기적인 분노로 가득한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반 고흐, 「방직공의 초상」(1884)
고흐는 극단적인 프로포즈를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유일한 여인에게로 리비도를 향할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멜랑콜리」라고 이름 붙인 것은 자신을 향한 리비도가 부정적 자책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여인의 모습을 자신 있게 또렷이 그리지 못한 것은 그 자책의 증거였던 것 같다.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서로 주고받는 사랑인가? 아니면 받기만 하는 사랑인가? 만약 받기만 하는 사랑을 꿈꾼다면 또 한 명의 나르시시스트가 출현한 셈이다. 그는 이기적 종교인처럼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신도 자기의 말을 듣는다고 여기겠지만, 그 눈가에는 다가온 사랑에 대한 외면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불안이 어린아이마냥 공존하고 있다.

사랑하려거든 치우친 사랑에 미소 짓는 이기적 어린아이, 저 우울한 나르시시스트적인 행동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 불행한 사랑은 억울한 사랑이 아니라 치우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