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화 아닌 '넛지'가 英 연금 정책 성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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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설립해 대국민 노후 대비 컨설팅영국 연금 제도는 최근 10여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2012년에는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했고 2015년에는 '연금 자유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들 정책은 늘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하고자 했다.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는 근로자가 원하면 연금 납입을 중단할 수 있도록 했고, 연금 자유화 정책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때 부과하던 55%의 높은 세금을 없애는 게 핵심이었다. 영국 정부가 고령화 사회 대비의 필요성을 가볍게 본 게 아니다. 방법이 '강제'에서 '넛지'(당사자가 직접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로 바뀌었을 뿐이다.
"제도가 힘 발휘하려면 생각도 바뀌어야"
이용자 "내 연금 확실히 이해하는 계기 돼"
영국 사람들은 새 직장에 출근한 첫날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에 따라 연금에 가입된 사실을 회사에서 서면으로 통보 받는다. 가입된 사람은 연 근로소득에서 최저소득(현 과세연도 기준 6240파운드로 약 1040만원)을 제외한 금액의 4%를 원천공제로 연금에 납입하게 된다. 직원이 원하지 않으면 납입을 중단할 수 있지만, 가입으로부터 한 달 이내에 서면으로 중단 의사를 밝혀야 하고 매 3년마다 다시 자동가입되기 때문에 그때마다 중단 의사를 다시 밝혀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 기어코 탈퇴한 사람은 사용자가 납입해 주는 3%와 정부가 세금 감면으로 보조해 주는 1%를 받을 수 없다. 영국 정부가 자동등록 제도에 대해 "탈퇴하면 임금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홍보하는 건 이 때문이다.영국 정부는 이 제도를 매우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 대상자 중 실제로 가입한 사람 비중이 2012년 55%에서 2021년에는 88%로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연금부(DWP)의 안드레아스 프리처드 연금정책 대변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알기 때문에 넛지를 통해 저축을 선택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며 "강제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했다. 영국 런던에서 일하는 30대 교사는 "퇴직연금에서 탈퇴해서 당장 손에 쥐는 돈보다 납입을 지속했을 때 나중에 받을 수 있는 돈이 더 많기 때문에 계속 납입하고 있다"고 했다.
2015년 시행한 연금 자유화 정책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인출하든, 연금으로 인출하든 같은 세금을 매기는 내용이다. 단 일시금 인출을 요구하면 정부가 만든 컨설팅 서비스 '펜션와이즈(Pension Wise)'의 컨설팅을 받아야 한다. 이 컨설팅은 일시금 인출을 요청한 사람이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스스로 돌아보고, 옳은 결정이었는지 숙고해 보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숙고의 기회 때문인지 영국에는 일시금 인출을 택해도 이를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정창률 단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시금으로 값비싼 물건을 사기보다는 다른 금융 기관의 연금 상품에 넣는 식으로 연금 갈아타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설령 "일시금을 받아서 사치품을 사고 싶다"고 해도 본인이 이를 끝까지 고집하면 펜션와이즈도 막을 수 없다.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울 뿐이다.펜션와이즈는 영국 정부가 법에 따라 설립한 기관 '자금과연금서비스(MaPS·The Money and Pensions Service)'가 운영하는 대국민 연금 컨설팅 서비스다. 모든 컨설팅은 무료로 제공된다. MaPS는 "사람들이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도움을 받고 싶어할 때 전문가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영국 정부의 철학에 따라 설립됐다. MaPS의 온라인 포털 '머니헬퍼'를 통해 지난해 4월부터 올 3월까지 연금 자문을 한 사람은 70만명에 이른다. 전·현직 금융사 임원이 MaPS 이사로 포함돼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돕는다. MaPS는 연금 수탁 사업자와 납입자를 서로 연결시키고, 연금 관련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정리한 포털사이트 '연금 대시보드(Pension Dashboards)'도 운영한다. 사람들은 연금 대시보드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연금 자산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다.MaPS는 온라인 및 유선 상담을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오프라인 설명회를 열거나 컨퍼런스에 참여하며 '현명한 돈 관리'를 위한 대국민 인식 개선 캠페인을 한다. 이달 초 펜션와이즈에서 연금 상담을 받은 지나 담렐씨는 "전문가에게 내 연금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았다"며 "이전에는 연금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상담을 계기로 확실히 이해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담 경험자 린 마스턴씨는 "상담 예약을 한 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통화를 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며 "내가 노후 준비를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했다"고 했다.
런던=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