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학대는 유전자에 새겨진다… 후성유전학의 세계

[arte] 책 리뷰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아몬드
540쪽┃2만9000원
GettyImagesBank.
'유전자(본성)냐, 경험(환경)이냐.' 인간을 완성하는 결정적 변수를 둘러싸고 수십년간 반복돼온 논쟁이다. 1990년대 후성유전학이 등장하며 이 논쟁은 또 다른 갈래를 맞는다. 후성유전학은 환경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즉,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특정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지거나 켜질 수 있다는 주장이 과학계에서 힘을 받고 있다.

최근 국내 출간된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책이다. 저자는 발달 및 인지 신경과학자인 데이비드 무어다. 그는 1990년대 전작 <의존하는 유전자>를 통해 유전자 결정론에 전면 반기를 들었다. 인간이 지닌 특징적 본성은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일부의 주장과 달리, 유전자는 절반의 진실만을 들려준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약 20년이 흐른 뒤 새로운 책을 펴냈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을 전제로 좀더 세밀한 얘기를 펼친다. 후성유전학 중에서도 '행동' 후성유전학을 살핀다. 후성유전(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DNA·RNA·단백질 등의 변형을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상태)의 효과가 정신 건강, 기억과 학습, 행동 같은 심리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한다.

심리학과 생물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음은 몸을 변화시키고, 몸은 마음을 움직인다. 우울증이 체중 증가에 미치는 영향이나 스트레스가 심장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등은 경험과 신체 간의 관계를 증명한다. 쌍둥이는 이런 점에서 후성유전학에서 논하기 흥미로운 사례다. 일란성 쌍둥이는 하나의 수정란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100% 동일한 DNA를 공유하지만, 환경에 따라 한 명만 조현병에 걸리는 등 특정 질병에서 불일치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2009년 한 연구실에서 자살자의 뇌에서 추출한 DNA와 그들의 어린시절 학대 경험을 분석한 결과, 생애 초기 경험이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GR 촉진유전자가 심하게 메틸화돼있었다. 즉, 뇌에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단백질들이 덜 발현돼있었다.

다만 저자도 말했듯 행동 후성유전학을 증명할 사례가 풍부하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윤리상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동물 사례를 통해 심리나 행동 특성을 분석하기는 인간보다 까다롭기 때문이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책 표지.
책은 총 23개장, 4부로 구성됐다. 1부와 2부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후성유전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3부에서는 후성유전적 영향이 후손으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논쟁적 학설들을 소개한다. 4부는 후성유전학 중 경계해야 할 지점을 짚어낸다.

책은 독자의 선택에 따라 학술서에 가까운 전문적인 책이 될 수도, 부담 없는 대중서가 될 수도 있다. 총 23개 장 중에서 6개 장에서는 직전 장의 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실에서 나온 세부 연구를 소개한다. 6개 장에는 제목에 '심층 탐구'라고 표시해놓았는데, 이 부분을 건너뛰고 읽어도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단, '심층 탐구' 장들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다음 번 '심층 탐구' 장의 정보를 이해하려면 그 전 '심층 탐구' 장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