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죽을 때까지 카랑카랑할, 가냘픈데 똑부러진 83년생 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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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정유미배우 정유미는 1983년생이다. 딱 마흔이 됐다. 정유미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종상, 부일영화상, 청룡영화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등을 휩쓸었다. 83년생 정유미는 ‘82년생 김지영’으로 정점을 찍었다... 고 생각했는데 최근 개봉된 ‘잠’을 보니 여전히 위를 향해, 최고점을 향해 냅다 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유미의 헤이데이(heyday)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긴 아직 젊다.
그럼에도 정유미는 벌써 중견이다. 지금껏 37편의 영화를 찍었다. 2004년에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데뷔해서 약 20년간의 활동 결과다. 정유미는 그때부터 13년이 지난 2017년 김종관 감독의 장편 옴니버스 영화 ‘더 테이블’에 다시 나온다.예전에 사귀었던 남녀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여자는 남자가 안 만난 사이에 인기 스타가 됐다. 여자는 오랜만에 남자를 만나러 오면서 (아주) 약간은 기대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회사 사무실에 돌아 가 사람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그녀에게서 사인을 받을 생각만 한다. 여자의 마음엔 실망과 경멸의 파도가 차오른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한번 식으면, 그렇게 끝나면 순식간에 쳐다보기도 싫은 관계가 된다. 남녀의 사랑이란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헤어지는 것도 잘해야 한다.
남녀 관계는 역전되기 십상이다. 처음엔 여자가 매달렸지만 나중엔 남자가 구차해진다.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더 테이블’에서 감독 김종관과 배우 정유미의 관계는 역전된 것처럼 느껴진다. 스타가 된 정유미에게 김종관 감독은 복잡한 속내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유미도 그걸 알았을까. 그녀도 표정이 묘하고 복잡해진다. 이 남자, 내가 좋아했던 그 인간 맞아, 하는 표정이 된다. 정유미는 돌발적으로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정에 잘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감정선의 집중도가 뛰어난 여배우이다.정유미는 어찌 보면 있는 듯 사실은 없는 듯 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세상 모두에게 알려진 얼굴이고 그런 사람, 또 그런 스타급의 배우이지만 세상 모두가 다 정유미를 자신만의 톱 배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어쩌면 배우에게는 역설적으로 최상의 조건일 수가 있다. 인정욕구는 충족시키면서도 그에 따른 구속감과 책임감은 덜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상을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자유가 허락될 수도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대중적인 공간에서 편하게 술 한잔, 식사 한번 하기에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딜 다닐 때마다 파파라치가 따라 붙고, 그루피들이 좇아 다닌다는 건 배우에겐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까지는 아니다. 정유미는 그에 대한 조절을 의도적으로 잘 해 온 것처럼 보인다.정유미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37편이나 출연을 해온 덕이다. 배우들 중에서는 고고한 스타의 자리에서 한사코 내려 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주연이 아니면 차라리 은퇴를 선택하는 배우들도 적지 않다.) 역할이 맞고 영화가 중요한 작품이라면 작은 역할, 숨겨진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정유미가 그런 경우이다. 그녀는 ‘도가니’ ‘부산행’ ‘염력’ ‘82년생 김지영’으로 세상 모두에게 알려졌지만 반면에 그녀의 장편 데뷔작 ‘가족의 탄생’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같은 홍상수 감독의 주옥같은 작품에 꽤 많이 출연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식이다.정유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까지는 아니었어도 분명 매력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는 작품이 바로 ‘깡패 같은 내 애인’이다. 정유미는 여기서 꽤나 카랑카랑하다.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멘트가 늘 똑.똑.똑. 부러지는 스타일로 연기를 한다. 약간은 화가 나 있거나 적어도 자존심이 가득한, 없어도 있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안하는 스타일의 여성상을 보여 준다. 없어서 브랜드 백을 들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짝퉁 브랜드를 갖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게 여성들의 진짜 자존심일 것이다. 시장 패션을 하고 다녀도 늘 자신감이 넘치는 모양새로 카랑카랑 묻고 대답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유미를 보고 있으면 가정 환경이 넉넉하지 못해 아빠 찬스나 엄마 찬스를 쓰지 못하고 살았지만 열심히 살아서 그런 엄마아빠에게 보란 듯이 잘 자란 모습을 보여주려는 일찍 철이 든 딸이 생각난다. 작은 회사의 면접시험장에서 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며 초조해 하는 갸날픈 여자 아이가 떠올려진다. 아 불쌍해라. 아이들이 철든 행동을 하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애는 애여야 하니까.
그러나 정유미 같은 철든 딸은 세상을 잘 버텨 낼 것이다. 그렇게 정유미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믿음의 불꽃을 땡긴다. 큰 눈망울은 늘 젖어 있지만 쉽게 방울이 돼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울먹이기 보다 차라리 나중에 우왕하며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게 낫다. 삶은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종종, 아니 아주 자주, 사람들의 무릎을 꿇게 하려 한다. 그럴 때 구걸하지 않아야 한다. 연약하지만 카랑카랑하게 버텨야 한다. 정유미가 우리와 동반하며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그런, 생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배우 중에 이런 배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든든해진다.배우 마동석은 늘 깡패 같은 형사, 깡패 이상의 조폭 두목을 주로 맡아 연기했지만 순애보를 지닌 깡패 같은 남편 역도 했었다. ‘부산행’에서 정유미의 남편 역이었을 때이다. 마동석은 여기서 만삭의 아내를 좀비 떼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 몸을 던진다. 어린 아내(정유미는 어디에서든 연상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게 정유미의 최대 약점이다.)는 최후까지 남편의 도움을 받는다. 약하고 어린, 그 중에서도 특히 어린 느낌의 아내로 정유미만한 여배우가 없다.‘잠’에서 정유미는 처음엔 남편을 지키려 한다. 몽유병에 걸려 온갖 기이한 행동을 하는 남자 곁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엔 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려 한다. 그래서 이번엔 남편, 아니 남편에게 들어 온 어떤 존재를 없애려 한다. 여성이 도달하려는 궁극의 지점은 모성이다. 정유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한번 카랑카랑 댄다. 83년생 정유미는 언제까지 그럴까.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끝까지 우리 곁에서 삶과 이 세상을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