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셰익스피어의 날들]“사랑에 미쳐있다면 로미오, 삶이 불안하다면 오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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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전이 된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셰익스피어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했다.”
철학자와 평론가들이 해석한 셰익스피어
"신은 인간을 만들고, 셰익스피어는 새로 창조했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1930~2019)은 1998년 펴낸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약 400년 전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등장하기 전, 문학 속 인물들은 평면적이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인물은 달랐다. 그들은 신이 아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괴로워하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했다. 블룸은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인간을 발명했다”며 “그 시대에 어떻게 수백 명의 개성 넘치는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지금 봐도 경이롭다”고 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셰익스피어 카운슬링>을 쓴 이탈리아 철학자 체사레 카타도 그런 점에 감탄한다. “그가 25년에 걸쳐 완성한 3만1534개 단어로 구성된 37편의 작품이 어떻게 인간의 모든 심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지야말로 셰익스피어에 얽힌 진정한 미스터리”라고 말한다. ‘인생의 불안을 해소하는 10번의 사적인 대화’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삶이 힘들 때 필요한 위로와 지혜를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찾는다.
저자는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미쳐 있다면 당신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랑을 찾았다면 당신은 베아트리체 혹은 베네디크입니다. 삶이 너무나 불안하다면 당신은 오셀로이고, 진실을 찾아 헤매다 이성을 잃은 당신은 햄릿이며, 내면의 어두움에 이끌려 폭력과 공포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당신은 맥베스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본 셰익스피어협회장을 지낸 가와이 쇼이치로 도쿄대 대학원 교수는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를 ‘인생의 달인’이라며 부르며, 그의 작품 속 대사를 인생 철학과 연관 지어 소개한다. ‘햄릿’ 1막 3장에 나오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안전해(Best safety lies in fear)” 같은 말이다. 직역하면 “최상의 안전은 두려움 속에 있다”는 이 말을 레어티스가 동생인 오필리아에게 건넨다. 햄릿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저자는 “실패나 사고는 ‘괜찮다, 문제없다’며 방심하고 있을 때 일어난다”며 “우리 삶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격언”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는 뉴욕대 로스쿨 헌법학 교수인 켄지 요시노의 책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타난 사건과 현대 사회의 난제들을 연결 지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셰익스피어는 정의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에 대해 고민했고, 희곡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온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고 설명한다.
비극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는 고트족과 로마제국 간 분쟁이 치열하던 제국 말기를 배경으로, 한 로마 장군의 처절한 복수극을 그린다. 저자는 법치주의가 확립되기 전 개인이 사사로운 복수를 해야 했던 이 이야기를 통해 9·11 테러 후 미국이 벌였던 아프간 전쟁을 돌아본다. “개인의 본능에 따라 복수극을 펼친다면 남는 건 (희곡에서처럼) 피와 먼지뿐”이라고 경고한다.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이란 책이 유명하다. 평민 출신인 셰익스피어는 주요 행적이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이로 따라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은 허상이며 작품들의 원저자가 따로 있다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제기돼 왔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제임스 샤피로는 셰익스피어의 행적을 집요하게 쫓아 셰익스피어가 원저자가 맞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유난히 비범한 인물이 아닌, 그저 보편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희곡과 시를 통해 작가의 인생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고 구시대적인 발상이라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향한 지나친 신성화가 오히려 셰익스피어 원작자설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 중 일부는 공저로 쓰였다는 학계의 연구를 지지한다. 공연·문화 기획자 최여정이 쓴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는 런던 여기저기에 아직 남아있는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쫓는다.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가 들락거렸던 맥줏집, 공주를 가둔 감옥과 처형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런던탑, 관객의 함성이 우렁우렁 퍼지고 노름판이 벌어졌던 거리, 전쟁과 화마(런던 대화재)의 기억.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집, 그가 오갔던 골목 등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