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키넨 ‘바그너 본색’… 노래하듯이 섬세했다 [리뷰]
입력
수정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도이치방송교향악단 내한독일의 도이치방송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올해 서울의 가을은 전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이 함께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체코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등이 줄지어 한국을 방문한다. 이날 도이치방송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올 가을 '클래식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었다.
韓서는 보기 어려웠던 잉키넨 표 바그너
선율적이고 세심한 음악…
관혁악을 성악처럼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에 입장하는 피에타리 잉키넨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이미 익숙했다. 현재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그가 지휘하는 바그너였다. 사실 피에타리 잉키넨은 올해도 바그너를 기념하는 음악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지휘했다. 그 뿐 아니라 재팬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오케스트라를 크게 성장시켰을 때, 그 중심엔 바그너 레퍼토리가 있었다. 자타공인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다'. 어쩐 일인지 한국에선 그가 지휘하는 바그너를 보기 어려웠는데, 이날 도이치방송오케스트라와 함께 바그너 스페셜리스트가 들려주는 바그너를 들을 수 있었다.
첫 곡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은 금관악기들이 순례자의 합창 선율을 아주 섬세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했다. 지휘자가 이 음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기도 한 잉키넨은 특히 현악 파트를 섬세하게 조율했다. 다이내믹을 치밀하게 설계했으며, 금관 파트의 커다란 볼륨 속에서도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덕분에 성악 파트는 없었지만, 마치 가수들이 노래하는 듯한 프레이즈를 만들었다.
이처럼 섬세하게 조율된 현악 파트의 활약은 공연 곳곳에서 감동을 주었다. 특히 1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2악장에선 그 표현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서주를 연주하는데, 긴 호흡이었지만 선율은 노래하듯 자연스러웠다. 열정적인 모션만큼이나 표현력이 뛰어났던 제2바이올린 수석은 작품에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었다. 덕분에 단지 스쳐 갈 뿐이었던 뉘앙스들이, 더욱 확실하게 표현되어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협연했던 피아니스트 손열음도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줬다. 마지막까지 스태미너를 잘 조절해 작품을 끝까지 높은 텐션으로 끌고 나갔다. 깊은 표현이 필요한 대목에선 과감하게 질렀다. 작품 구조를 놓치지 않고 보여준 덕분에 수많은 음표 속에서도 피아니스트의 존재가 돋보였다. 앙코르는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작품번호 32-5였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위한 선곡이었다.
2부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었다. 이 작품은 목관악기들이 주요 주제들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초반부 목관악기들이 앙상블을 이루지 못한 게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도이치방송오케스트라에게 베토벤은 어느 작곡가보다 익숙한 작품이었다.
이들은 두터운 소리를 바탕으로, 작품을 빠르게 쌓아올렸다. 빠른 템포로 종횡무진했던 4악장에선 저음의 스트링 파트가 뚜렷하게 연주돼 작품에 에너지를 더했다. 섬세한 리듬이 주는 짜릿함보다는 원초적이고 거친 리듬의 매력을 보여줬다.호흡이 긴 악구에서 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2악장이 그랬다.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았으며, 여린 소리부터 시작해서 센소리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치밀하고, 영리했다. 클라이맥스까지 이르는 과정이 한편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앙코르 곡은 두 개였다. 첫 번째 앙코르는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이었다. 첫 곡으로 연주된 ‘탄호이저 서곡’과 마찬가지로 잉키넨의 강점이 아주 잘 드러난 연주였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보다 목관악기들의 색깔과 앙상블이 한결 선명했으며,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각 악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비록 전주곡 뿐이었지만, 잉키넨이 바그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 수 있었다.두 번째 앙코르는 오롯이 한국 관객들을 위한 것이었다.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한국 정서를 꿰뚫은 잉키넨은 ‘그리운 금강산’을 관객들에게 선물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뜨겁게 화답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