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8자 곡선의 잘록한 관능미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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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月光) 소섬
-달, 두꺼비
고두현달빛에 엎드린 그대 곁으로
구름 같은 음악이 흐르고
월광의 은하, 굽이도는 물가으로
뽀얗게 달무리 진 젖빛이 몽긋하다.
앞산 낮은 허리
풍만한 하늘이 덮어
세세토록 둥근 몸 안에
떡두꺼비 아들 하나
자라는 그곳.
---------그날 저녁 우연히 ‘무진기행’에 들렀지요. 우리 마음속의 안개 도시, 김승옥 소설 제목과 같은 그 카페의 이름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흔들리는 밤 배의 불빛처럼 우리를 불러들였죠. 그날 밤 신촌역 부근에는 남쪽 바닷가의 해무(海霧)처럼 안개와 어둠이 낮게 깔리고 있었습니다.
탁자가 서너 개밖에 되지 않는 안개 속의 그 섬에서 우리는 촛불이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진의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그 선배가 카페 벽면에 세워져 있던 통기타를 갖고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어요. 그는 한참 동안 기타는 치지 않고 기타의 몸만 쓰다듬었습니다.그때 처음 느꼈죠. 아라비아 숫자 8을 닮은 기타의 몸체에서 은은하게 우러나는 관능미! 잘록하게 휘인 허리와 풍만하게 이어지는 엉덩이의 곡선이라니! 그것은 소리로만 듣던 기타의 육체,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음악이었습니다.
그렇게 기타의 몸에서 나는 향기까지 느긋하게 맛본 다음에야 그는 기타 줄을 하나씩 퉁기기 시작했지요.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현의 떨림은 강해지고 그때마다 우리는 지난날의 추억 속으로 깊이 자맥질하곤 했습니다. 움츠러들었던 감성의 촉수들이 일제히 살아나 우리 몸을 깨우고 귀를 틔우고 눈을 뜨게 했죠.
그 공간은 하늘과 땅의 경계였고 바다와 뭍이 만나는 접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몸을 맞대고 살을 부비며 한없이 높고 깊은 영혼의 교감으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밤의 카페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습니다.단지 여섯 개의 줄로 풍만한 몸을 버팅기고 있는 통기타의 애잔함이란, 우리 삶의 곡진함을 잘 견디게 해주는 끈이 아니었을까…. 그 속에서 나오는 몇 옥타브의 공명음이 우리를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게 해주기도 했지요.
밖에는 아직도 엷은 안개가 깔려 있었습니다. 새벽을 여는 흰 이불 홑청의 흔들림도 경이로웠습니다. 우리는 점차 밝아오는 바깥 풍경과 스스로 밝혀놓은 내면의 풍경 사이에서 작은 카페가 주는 행복에 마냥 젖어 들었지요. 문을 나섰을 때, 희부연 하늘 한편에서 발견한 새벽달의 뽀얀 매무새는 또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바로 그 순간 달의 다른 이름인 소섬(素蟾)이 떠올랐습니다. 본디 흰 바탕에 달 두꺼비가 사는 나라. 그리고 ‘달빛에 엎드린 그대 곁으로/ 구름 같은 음악이 흐르고/ 월광의 은하, 굽이도는 물가으로/ 뽀얗게 달무리진 젖빛이 몽긋하다’는 구절을 얻었지요.곧이어 ‘앞산 낮은 허리/ 풍만한 하늘이 덮어/ 세세토록 둥근 몸 안에/ 떡두꺼비 아들 하나/ 자라는 그곳’이라는 시구가 따라 나왔습니다. 통기타 몸체와 달빛과 리듬이 어우러져 순식간에 시 한 편을 얻은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 듣는 통기타 소리에는 천 년 전 발해금(琴)의 저음이 함께 담겨 있어 좋습니다. 발해금은 다른 금보다 음이 하나 낮았지요. 가늘고 긴 일곱 줄에 몸을 묶고 풍진의 세월을 견뎌온 슬픔. 그 앞에서는 누구나 귀를 비우고 몸을 비우고, 슬픔의 밑동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외로운 날에는 창밖의 낙엽을 바라보며 낮고 은은한 음악을 듣는 게 좋았죠. 삼박자 리듬의 저음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기분 좋은 날은 브라질 삼바 음악처럼 사분의이박자로 출렁거리는 리듬을 즐기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통기타의 경쾌함은 싱그러운 풀꽃 노래를 닮았지요.연하디연한 풀들이 서로 잎을 부딪쳐 내는 소리. 그 속에서 ‘달빛에 엎드린 그대’와 ‘구름 같은 음악’을 들으며 ‘뽀얗게 달무리진 젖빛’은 얼마나 달큰하고 몽긋한지 모릅니다. 그날 그 느낌을 오늘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달, 두꺼비
고두현달빛에 엎드린 그대 곁으로
구름 같은 음악이 흐르고
월광의 은하, 굽이도는 물가으로
뽀얗게 달무리 진 젖빛이 몽긋하다.
앞산 낮은 허리
풍만한 하늘이 덮어
세세토록 둥근 몸 안에
떡두꺼비 아들 하나
자라는 그곳.
---------그날 저녁 우연히 ‘무진기행’에 들렀지요. 우리 마음속의 안개 도시, 김승옥 소설 제목과 같은 그 카페의 이름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흔들리는 밤 배의 불빛처럼 우리를 불러들였죠. 그날 밤 신촌역 부근에는 남쪽 바닷가의 해무(海霧)처럼 안개와 어둠이 낮게 깔리고 있었습니다.
탁자가 서너 개밖에 되지 않는 안개 속의 그 섬에서 우리는 촛불이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진의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그 선배가 카페 벽면에 세워져 있던 통기타를 갖고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어요. 그는 한참 동안 기타는 치지 않고 기타의 몸만 쓰다듬었습니다.그때 처음 느꼈죠. 아라비아 숫자 8을 닮은 기타의 몸체에서 은은하게 우러나는 관능미! 잘록하게 휘인 허리와 풍만하게 이어지는 엉덩이의 곡선이라니! 그것은 소리로만 듣던 기타의 육체,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음악이었습니다.
그렇게 기타의 몸에서 나는 향기까지 느긋하게 맛본 다음에야 그는 기타 줄을 하나씩 퉁기기 시작했지요.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현의 떨림은 강해지고 그때마다 우리는 지난날의 추억 속으로 깊이 자맥질하곤 했습니다. 움츠러들었던 감성의 촉수들이 일제히 살아나 우리 몸을 깨우고 귀를 틔우고 눈을 뜨게 했죠.
그 공간은 하늘과 땅의 경계였고 바다와 뭍이 만나는 접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몸을 맞대고 살을 부비며 한없이 높고 깊은 영혼의 교감으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밤의 카페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습니다.단지 여섯 개의 줄로 풍만한 몸을 버팅기고 있는 통기타의 애잔함이란, 우리 삶의 곡진함을 잘 견디게 해주는 끈이 아니었을까…. 그 속에서 나오는 몇 옥타브의 공명음이 우리를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게 해주기도 했지요.
밖에는 아직도 엷은 안개가 깔려 있었습니다. 새벽을 여는 흰 이불 홑청의 흔들림도 경이로웠습니다. 우리는 점차 밝아오는 바깥 풍경과 스스로 밝혀놓은 내면의 풍경 사이에서 작은 카페가 주는 행복에 마냥 젖어 들었지요. 문을 나섰을 때, 희부연 하늘 한편에서 발견한 새벽달의 뽀얀 매무새는 또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바로 그 순간 달의 다른 이름인 소섬(素蟾)이 떠올랐습니다. 본디 흰 바탕에 달 두꺼비가 사는 나라. 그리고 ‘달빛에 엎드린 그대 곁으로/ 구름 같은 음악이 흐르고/ 월광의 은하, 굽이도는 물가으로/ 뽀얗게 달무리진 젖빛이 몽긋하다’는 구절을 얻었지요.곧이어 ‘앞산 낮은 허리/ 풍만한 하늘이 덮어/ 세세토록 둥근 몸 안에/ 떡두꺼비 아들 하나/ 자라는 그곳’이라는 시구가 따라 나왔습니다. 통기타 몸체와 달빛과 리듬이 어우러져 순식간에 시 한 편을 얻은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 듣는 통기타 소리에는 천 년 전 발해금(琴)의 저음이 함께 담겨 있어 좋습니다. 발해금은 다른 금보다 음이 하나 낮았지요. 가늘고 긴 일곱 줄에 몸을 묶고 풍진의 세월을 견뎌온 슬픔. 그 앞에서는 누구나 귀를 비우고 몸을 비우고, 슬픔의 밑동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외로운 날에는 창밖의 낙엽을 바라보며 낮고 은은한 음악을 듣는 게 좋았죠. 삼박자 리듬의 저음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기분 좋은 날은 브라질 삼바 음악처럼 사분의이박자로 출렁거리는 리듬을 즐기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통기타의 경쾌함은 싱그러운 풀꽃 노래를 닮았지요.연하디연한 풀들이 서로 잎을 부딪쳐 내는 소리. 그 속에서 ‘달빛에 엎드린 그대’와 ‘구름 같은 음악’을 들으며 ‘뽀얗게 달무리진 젖빛’은 얼마나 달큰하고 몽긋한지 모릅니다. 그날 그 느낌을 오늘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