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ARM 상장

1983년 영국 공영방송 BBC가 ‘컴퓨터 문맹 퇴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영국 전자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린 아콘(Arcon)이 PC 보급사로 선정됐다. 아콘은 대서양 건너 미국 인텔이 밀던 중앙처리장치(CPU) ‘X86’과 다른 프로세서를 원했다. 1991년 CPU를 개발하기 위해 애플과 손잡고 조인트벤처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ARM(Advanced RISC Machines)이다. ARM은 반도체의 기본 설계도를 만들고 관련 지식재산(IP)을 팔아 로열티 수익을 낸다.

ARM의 모태인 아콘은 2001년 문을 닫았다. 인텔 CPU를 쓰는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아콘의 몰락을 지켜본 ARM은 ‘차별화’에 중점을 뒀다. 전력 소모가 적은 제품을 설계하는 데 매진했다. 타깃 시장도 소형 가전으로 잡았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ARM 설계 기반 휴대폰용 CPU를 만들고, 이를 노키아에 납품하면서 ARM은 이름을 떨쳤다. 애플 아이팟에도 ARM 기반 칩이 들어갔다.스마트폰의 등장은 ARM에 로또가 됐다. PC보다 단순한 작업을 하는 스마트폰엔 ARM 설계가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퀄컴 등 대부분 칩 개발사가 ARM 설계를 기반으로 AP를 내놨다. ARM의 스마트폰용 AP 설계 시장 점유율은 ‘99%’다. ARM이 벌어들이는 돈은 매년 3조원을 넘는다. ARM에 매료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016년 320억달러(약 42조5000억원)에 지분 100%를 인수했다. ‘덤터기 썼다’는 일각의 지적에도 손 회장은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했다”고 흡족해했다.

ARM이 14일(현지시간) 나스닥시장에 상장했다. 주가는 공모가(51달러) 대비 24.7% 급등했다. 시가총액은 652억달러로 치솟았다. 손 회장은 상장 과정에서 지분 10%를 매각해 48억7000만달러의 이익을 실현했다. 그가 보유한 ARM 지분 90%의 가치는 587억달러로 투자금액의 183%를 웃돈다. 위워크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로 체면을 구긴 손 회장으로서는 자신의 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 같다. 한국은 왜 이런 투자 기회를 가지지 못했는지, 부럽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다.

황정수 산업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