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도, 서로가 있기에…가슴 아프도록 고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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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터널 메모리'“기억을 잃으면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다(Without memory, there is no identity).”
칠레 독재 폭로한 언론인이었지만
알츠하이머로 기억 잃는 남편과
함께하는 아내의 감동적 사랑
부부가 직접 찍은 장면도 많아
칠레 다큐멘터리 영화 ‘이터널 메모리’ 후반부에서 칠레의 유명한 배우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파울리나 우루티아가 남편 아우구스토 공고라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는 책의 한 문장이다. 우루티아가 읽고 있는 책은 칠레 언론인이자 작가인 공고라가 쓴 <칠레: 금지된 기억>이다. 공고라는 이 책에서 “칠레가 계속 발전하려면 자신의 과거를 감정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기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과거는 피노체트 쿠데타 정권의 군부 독재 시기(1973~1990년)를 말한다. 그는 이 시기에 군부 독재의 폐해와 범죄를 외부에 알리는 ‘지하 언론인’으로 활동했다.공고라는 ‘기억의 재구성’도 강조한다.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영향을 받으며 계속해서 재구성된다. 우리를 제대로 보고, 문제를 알고, 또 약점을 알아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너그럽게 맞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 노부부가 함께 산책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병 증세가 심해진 공고라는 푸념하듯이 혼잣말처럼 되뇐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야.” 아내는 남편에게 다가가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라며 토닥거린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이터널 메모리’는 우루티아가 공고라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병에 어떻게 함께 대응하며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지를 이들 노부부의 개인사가 담긴 옛 영상과 역사적인 기록물 등을 곁들여 펼쳐낸다. 2020년 노화문제를 다룬 전작 ‘요양원 비밀요원’으로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수상 후보에 오른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이 2019년부터 촬영을 시작해 올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했다. 촬영 시기에 코로나19가 극심해 제작진과의 접촉이 허용되지 않을 때 우루티아가 직접 둘의 모습을 찍었다. 아침에 침실에서 대화하는 모습 등 노부부의 내밀한 장면들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순간들을 보여준다.우루티아는 공고라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지 2년 후인 2016년에 그와 결혼한다. 공고라와 사랑에 빠진 지 19년 만이다. 우루티아는 자신의 무대 리허설 등에 공고라를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과 삶의 즐거움을 나눈다. 공고라의 기존 장성한 두 자녀도 아버지에게 헌신적인 우루티아에게 우호적이다. 두 노부부가 주고받는 웃음과 언제나 서로를 향한 미소 가득한 눈, 함께 나누는 포옹, 나란히 손잡고 걷는 모습 등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때때로 우루티아와 함께 일군 집과 자신의 소중한 책들뿐 아니라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공고라와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우루티아의 모습은 가슴 아프다.
2019년 우루티아의 강연에 참석한 공고라의 모습을 본 알베르디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제안했을 때 두 부부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우루티아는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고사한 반면, 공고라는 이렇게 답변했다. “나의 나약함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내게 닥친 이 상황만이 예외가 될 이유가 있을까?”
공고라는 저서 <칠레: 금지된 기억>을 연애 시절 우루티아에게 선물하며 이렇게 책 표지에 적었다. “이 책을 쓰는 데 6년이 걸렸어요. (…)여기에는 고통과 공포가 가득하지만 고귀함도 가득해요. (…)당신은 기억하고 있고, 용기를 가지고 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에요.”이 영화도 그렇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장면도 나오지만 ‘영원한 기억’을 남기려는 노부부의 사랑은 고귀함으로 가득하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