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피카소' '뚱보화가' 세계적 미술가 보테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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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출신 세계적인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가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현지 일간지 엘티엠포,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보테로는 이날 모나코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보테로의 딸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고 매체들은 전했다.보테로는 '남미의 피카소' '뚱보화가' 등으로 불린다. 60년 넘게 선보인 특유의 '보테로모프' 화풍 때문이다. 그는 마치 풍선처럼 부푼 사람과 사물을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 등을 보테로 특유의 화풍으로 재해석한 그림 등이 유명하다.
'만돌린'은 보테로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그는 몸통이 동그란 악기 만돌린을 그리다가 영감을 얻어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한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에게 기타가 주요 모티프였던 것처럼.보테로의 작품에는 자신의 생애와 고국 사회의 모습이 녹아있다.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삼촌의 권유로 소년 시절 투우사 양성 학교에 다녔다.투우장은 어린 보테로를 투우사가 아닌 예술가로 만들었다. 소년은 투우장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투우장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경기장에서 펄럭이는 강렬한 색채의 깃발들은 소년의 영혼을 물들였다.
보테로는 황소와 투우사를 그렸고, 그림을 본 삼촌은 보테로에게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 화가를 꿈꾸게 된 보테로는 생계를 위해 신문 삽화 등을 그렸다.
16세였던 1948년 첫 작품 발표회를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스무 살 무렵 유럽으로 건너가 1년을 보냈다. 벨라스케스, 고야 등 르네상스 명화를 모사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갔다.'뚱보화가'로 알려졌지만 보테로는 생전 "나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게 아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사람, 동물, 과일 등의 관능적 느낌을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풍만함을 그려내는 이유에 대해 "현실은 상당히 메말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해학적 그림 안에는 현실 사회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정치인이나 종교적 상징을 캠퍼스로 끌고 와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2005년에는 미국 감옥에서 학대 당하는 이라크 포로들의 사진을 특유의 화풍으로 그려내 미술계 논쟁에 불을 붙였다. 콜롬비야 마약 문제 등 고국의 폭력과 부조리를 작품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작가다. 그는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페르난도 보테로 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보테로는 "13세기 이탈리아에서부터 양감(볼륨)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에 갔다가 양감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생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가 남긴 그림, 조각 등 작품은 3000여 점에 달한다. 80대에도 하루 8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보테로는 열정적 수집가이기도 했다. 가난을 딛고 화가가 된 보테로는 프랜시스 베이컨,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 등의 명작 수백점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모은 걸작들과 자신의 작품 100점 이상을 고국에 기증했다. 기증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리의 전통과 결점을 아우른, 미덕의 화가 보테로가 세상을 떠났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향인 메데인시는 7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다니엘 퀸테로 메데인 시장은 "보테로의 걸작들은 도시에 계속 전시될 것"이라며 "그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현지 일간지 엘티엠포,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보테로는 이날 모나코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보테로의 딸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고 매체들은 전했다.보테로는 '남미의 피카소' '뚱보화가' 등으로 불린다. 60년 넘게 선보인 특유의 '보테로모프' 화풍 때문이다. 그는 마치 풍선처럼 부푼 사람과 사물을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 등을 보테로 특유의 화풍으로 재해석한 그림 등이 유명하다.
'만돌린'은 보테로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그는 몸통이 동그란 악기 만돌린을 그리다가 영감을 얻어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한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에게 기타가 주요 모티프였던 것처럼.보테로의 작품에는 자신의 생애와 고국 사회의 모습이 녹아있다.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삼촌의 권유로 소년 시절 투우사 양성 학교에 다녔다.투우장은 어린 보테로를 투우사가 아닌 예술가로 만들었다. 소년은 투우장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투우장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경기장에서 펄럭이는 강렬한 색채의 깃발들은 소년의 영혼을 물들였다.
보테로는 황소와 투우사를 그렸고, 그림을 본 삼촌은 보테로에게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 화가를 꿈꾸게 된 보테로는 생계를 위해 신문 삽화 등을 그렸다.
16세였던 1948년 첫 작품 발표회를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스무 살 무렵 유럽으로 건너가 1년을 보냈다. 벨라스케스, 고야 등 르네상스 명화를 모사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갔다.'뚱보화가'로 알려졌지만 보테로는 생전 "나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게 아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사람, 동물, 과일 등의 관능적 느낌을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풍만함을 그려내는 이유에 대해 "현실은 상당히 메말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해학적 그림 안에는 현실 사회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정치인이나 종교적 상징을 캠퍼스로 끌고 와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2005년에는 미국 감옥에서 학대 당하는 이라크 포로들의 사진을 특유의 화풍으로 그려내 미술계 논쟁에 불을 붙였다. 콜롬비야 마약 문제 등 고국의 폭력과 부조리를 작품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작가다. 그는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페르난도 보테로 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보테로는 "13세기 이탈리아에서부터 양감(볼륨)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에 갔다가 양감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생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가 남긴 그림, 조각 등 작품은 3000여 점에 달한다. 80대에도 하루 8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보테로는 열정적 수집가이기도 했다. 가난을 딛고 화가가 된 보테로는 프랜시스 베이컨,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 등의 명작 수백점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모은 걸작들과 자신의 작품 100점 이상을 고국에 기증했다. 기증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리의 전통과 결점을 아우른, 미덕의 화가 보테로가 세상을 떠났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향인 메데인시는 7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다니엘 퀸테로 메데인 시장은 "보테로의 걸작들은 도시에 계속 전시될 것"이라며 "그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