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정권 비판한 '현대미술 거장' 키퍼, 한국서 첫 개인전

대전 헤레디움 개관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2021
작가 안젤름 키퍼는 ‘현대미술 거장’ ‘신표현주의 선구자’로 세계 전후(戰後) 미술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나치 정권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구 문명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기고 있다.

키퍼는 2007년 살아있는 작가 중에서 두 번째로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자신의 작품을 영구 설치한 작가다. 지난해 열린 제59회 베네치아비엔날레서는 두칼레 궁전에서 단독 전시를 열며 위상을 증명하기도 했다. 당시 전시에서 키퍼는 넓은 궁전 대회의실 네 면의 벽을 모두 자신의 페인팅 대작들로 덮었다. 특히 천장에는 야코포 틴토레토의 500년 전 작품 '천국의 영광'이 그려져 있어 마치 현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의 그림 대결을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쓰고 있는 키퍼가 개인전을 열고 한국 관객을 찾는다. 대전 동구 인동 헤레디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안젤름 키퍼 : 가을, 하비스트’을 통해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가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 16점을 포함한 총 17여점이 관객을 맞는다. 키퍼가 한국 미술관에서 대형 단독전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젤름 키퍼 작품 (자료제공 HEREDIUM)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키퍼가 평소 사랑해 온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 시리즈 시집 세 권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업했다. 키퍼는 평소 이 시집을 전부 외울 정도로 릴케를 좋아해왔다. 전시에 나온 몇 작품 위에는 시 구절을 적어놓기도 했다. 작품 ‘다이 비스터 폴른’에는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 문장도 남아있다.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과거사를 캔버스 위에 풀어낸 키퍼의 작품 대부분은 다소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가 해 온 작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폐허'다. 그의 과거 작품들부터 현재까지, 그림 속 모든 존재들은 무너지거나 망가진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키퍼가 폐허에 꽂힌 까닭은 바로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와 연관이 깊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폭탄에 의해 집이 무너진 날 세상에 태어났다. 키퍼의 탄생과 동시에 살아갈 집이 폐허로 변한 것이다. 전쟁과 폐허의 상흔을 입고 자라 예술가가 된 키퍼는 당시 독일에서 마치 '금기어'처럼 여겨졌던 나치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내며 세상에 폭탄을 던졌다.

한국을 찾은 그는 이번에도 역시 '폐허'를 주제로 전시를 꾸렸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에서는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 작품들을 내놓았다. 황량한 듯 바닥에 떨어져 버린 낙엽 그림에서는 '끝'이 아닌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재탄생'을 표현했다. 들판에 홀로 선 건물을 통해서는 폐허의 쓸쓸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곳이 떠도는 누군가에겐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헤레디움 제공
2층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작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붉은 공사용 벽돌이 집처럼 쌓이다 무너진 모습이다. 키퍼가 표현하고자 했던 무너지고 쓰러져 가는 폐허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지난해 서울 타데우스로팍에서도 전시되며 화제를 모았다.
안젤름 키퍼는 금부터 납, 모래, 나무, 흙까지 다양한 재료를 캔버스 위에 쌓아 입체적 작품을 만든다. 비회화적 재료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회화보다는 조각 또는 설치미술과 같은 느낌을 준다. 1층 벽면 한가운데에 설치된 대형 작품에서는 가을날 양동이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양동이와 낙엽 모두 물감으로 그리지 않고 금속으로 만들어 캔버스 위에 붙였다.

과거사에 대해 작업으로 목소리를 내 온 키퍼와 헤레디움의 존재 의미는 닮았다. 헤레디움이 개관 첫 전시로 키퍼를 모셔 온 이유다. 헤레디움은 1922년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전지부 건물을 그대로 인수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거쳐 설립 100년 만인 올해 문화공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헤레디움은 키퍼를 개관전 주인공으로 올리기 위해 그가 소속돤 갤러리인 타데우스로팍에 직접 메일을 보내며 섭외를 요청해 전시가 성사됐다.
안젤름 키퍼 작품 (자료제공 HEREDIUM)
그래서인지 건물도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특히 2층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100년 전에 만들어진 천장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외벽 타일도 첫 공사 당시에 쓰였던 것이 그대로 남은 경우가 많다.

특히 '대한민국 3대 미술 도시'로 익히 알려진 서울과 대구, 부산이 아니라 '제 4의 도시'인 대전에서도 해외 거장의 대형 전시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진 의미가 크다. 미술관, 복합공간 개관 등 문화 인프라의 확장으로 지역에도 좋은 전시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은 "키퍼가 작품과 작업을 통해 전달하는 이야기와 헤레디움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다"며 ”100년 그대로를 복원한 헤레디움의 건물도 또 다른 작품이다"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2024년 1월 31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