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정점에 홀연히 사라진 강서경, 암과 싸우며 만든 '꾀꼬리의 세상'
입력
수정
리움미술관 강서경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열한 번째 광주비엔날레가 열린 2016년. 해외 갤러리와 미술관들은 한 30대 한국 여성 작가의 작품을 보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추상미술의 대안을 제시했다”, “미니멀리즘의 완벽한 재해석”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2년 뒤 이 작가의 작품은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2018년 미국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상하이비엔날레와 리버풀비엔날레에 초청받았다. 같은 해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엔 베네치아비엔날레 본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하는 영예도 따랐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꽃이 만개한, 화양연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짙은 어둠이 그에게 찾아왔다. 암 판정을 받았고, 그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그 작가의 이름은 강서경(46). 3년간 암과 싸우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M2에서 ‘버들 북 꾀꼬리’로 우리를 다시 찾았다. 지난 6일 개막한 강서경의 이 전시는 그야말로 지독한 병과 싸운 작가 자신의 기록이자 사투의 결과이기도 하다. 작품의 90%는 신작. 그동안 연 전시 중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시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작가는 말한다. “스스로에게, 관객들에게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3년을 기다린 리움, 죽어라 작업한 강서경리움미술관은 2020년 재개관을 1년 앞두고 강서경 작가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리소문 없이 잠정 중단됐던 이 전시는 그래서 더 각별하다. 리움이 개관 20년간 미술관에서 국내 생존 작가의 개인전을 연 건 서도호, 양혜규, 김범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그의 전시 소식이 알려지자 이름 석 자만으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보테가베네타는 전시 후원을 전격 결정하기도 했다. 전시 개막에 앞서 하얗게 센 머리로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강 작가는 “예전엔 검고 숱 많은 머리였는데, 암 투병 이후 검은 머리가 나지를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투병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이날이 처음. 투병 중에도 리움 개인전을 위해 작업을 손에 놓지 않았고, 기자들을 만나기 이틀 전까지도 항암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강서경의 작품이 해외 미술계를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작업이 ‘동양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면 사실 동양도, 회화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은 그림보다 조각과 설치 미술에 더 가깝고, 현대미술의 전형적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모든 작업의 시작은 회화다.
강 작가에게 회화는 단순한 평면 작업이 아니다. 그는 “회화란 보이지 않는 사각 공간을 인지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작업”이라며 그림을 공감각적으로 늘이고, 흔들고, 세웠다. 그런 확장의 과정을 통해 조각에 더 가까운 형태로 변형시켰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 미셸 쿠오는 이런 그의 작품을 두고 “회화 같기도, 조각 같기도, 또 실험미술 같기도 한 ‘마성의 매력’이 있다”고도 표현했다. 전통에서 찾은 현대미술의 미래
자세히 감상하다 보면 모든 작품의 기반에는 한국적 요소가 깔린다. 그 전통을 누구보다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는 게 강서경만의 강점이다. 강서경은 서양인들이 가진 틀에 박힌 동양 미술의 범주에서 보란 듯 벗어나 동양의 전통을 가지고 ‘현대의 미’를 요리한다. 해외 전시를 열 때마다 탄성이 터지는 이유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풀어낸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전시는 매번 충격을 줬다.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강서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정(井)’, ‘자리’ 그리고 ‘모라’ 연작이다. 이번 전시에도 나온 ‘정’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기본 개념으로 여겨지는 사각의 ‘그리드’를 조각 그 자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많은 현대미술 대가가 이 그리드에 매혹됐지만, 강서경에게는 단순 ‘사각형’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 출발점은 그리드가 아니라 ‘정간보’다. 정간보는 세종이 만든 오선지 형태의 악보로, 사각형 속 글자의 위치에 따라 악기 음의 높낮이가 나뉜다. 오선지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한국식 악보’란 얘기다. 강 작가는 2014년 우연히 정간보에 쓰인 ‘쌍화점’의 가사를 본 뒤 사각형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 전통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을 하다 조선시대 1인 궁중 무용 ‘춘앵무(春鶯舞)’에도 매료됐다. 무용수 한 사람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바닥에 까는 ‘화문석’을 작업에 차용하며 ‘자리’ 연작이 탄생했다. 강서경은 이번 리움 전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자리’를 들고나왔다. 회화 연작 ‘모라’는 캔버스가 아니라 한지나 비단 위에 먹으로 한 겹 한 겹 색을 입혔다. 유화처럼 색 위에 색을 덮는 느낌 대신 서로 스며들어 새로운 색을 만드는 동양화만의 특징을 재료로써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강서경이 그린 ‘모라’ 27점이 마치 탑처럼 높이 쌓인 채 전시장에 세워졌다.
더불어 함께하는 풍경, 꾀꼬리들의 세상‘버들 북 꾀꼬리’ 전시는 M2전시관 어느 한 곳도 허투루 쓰지 않고 곳곳마다 작품을 펼쳐 놓았다. 한 폭의 산수화처럼 꾸민 곳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신작 ‘산’ 시리즈는 사계절을 모티브로 네 가지 작품이 전시됐는데, 그 높이가 160㎝를 넘기지 않는다.
“원래 작품을 더 넣고 싶었는데, 리움에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렸을 정도죠. 지난 3년은 ‘더불어 함께하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리움 전시장에서 수천, 수만의 꾀꼬리가 자연 속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어요. 관객들이 산수풍경화 같은 전시관을 지나갈 때 눈높이와 비슷한 크기의 산이 주변을 스치는 느낌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전시 제목에 쓰인 ‘꾀꼬리’란 곧 ‘인간’을 의미하죠. 수많은 사람이 제가 만든 풍경 안에서 공존하길 바랐습니다.” 핵심 연작인 ‘정’, ‘자리’, ‘모라’도 건축적으로 그 크기가 커지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다. 한 사람의 신체 크기를 넘기지 않았던 이전의 ‘자리’ 연작과 달리 이번 리움에 전시된 자리는 그 경계가 몇 배로 늘었다. “아픈 시간을 겪으며 한 사람의 경계 대신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그가 최초로 선보인 모빌 작업, 투병 중 구상한 새 연작 ‘아워스’에는 작가의 경험이 짙게 녹아 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모빌엔 자유로운 움직임과 공감각적 자극이 극대화됐다. 공중에 매달려 얼핏 위태로워 보이지만 굳건하게 그 무게를 지탱해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마치 그의 지난 시간을 말하듯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