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도롱이-비는 실실 오고 36, 김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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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원시]
도롱이
- 비는 실실 오고 36
김승종
비 실실 오는 추석
오백 리 뿌옇게 흔들리는 빗길가지 못한 신덕(新德) 옛집 금시서옥(今是書屋)
툇마루 아래 삭는 도롱이
돌아간 아버지의 어깨
어깨에 걸치고 빗길로 나선다
[태헌의 한역]
蓑衣(사의)細雨濛濛仲秋節(세우몽몽중추절)
五百里路煙中遐(오백리로연중하)
不肖今未歸(불초금미귀)
新德有古家(신덕유고가)
今是書屋退軒下(금시서옥퇴헌하)
蓑衣一襲自朽枯(사의일습자후고)
遙見吾先親(요견오선친)
肩蓑向雨途(견사향우도)
[주석]
* 蓑衣(사의) : 도롱이. 짚 혹은 띠풀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 細雨(세우) : 가랑비. / 濛濛(몽몽) : <이슬비 따위가> 자욱한 모양, 부슬부슬 내리는 모양. / 仲秋節(중추절) : 중추절, 추석.
* 五百里路(오백리로) : 오백 리 길. / 煙中(연중) : 안개 속. 원시의 ‘뿌옇게’를 상황에 맞게 역자가 고쳐 번역한 것이다. / 遐(하) : 멀다, 아득하다. / 원시의 ‘흔들리는’을 상황에 맞게 역자가 고쳐 번역한 것이다.
* 不肖(불초) : 불초, 이 몸. 부모님 등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칭한 말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이다. ※ 원시에서 생략된 주어를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충한 것이다. / 今(금) : 지금. ※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未歸(미귀) : 돌아가지 못하다, 귀성하지 못하다.
* 新德(신덕) : 신덕리. 경북 안동에 있는 마을 이름. / 有(유) : ~이 있다. / 古家(고가) : 옛집.
* 今是書屋(금시서옥) : 시인의 선친인 김시박(金時璞) 선생의 서재(書齋) 이름. / 退軒(퇴헌) : 툇마루. / 下(하) : ~ 아래.
* 一襲(일습) : (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 自(자) : 스스로, 저절로. ※ 앞의 ‘一襲’과 함께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朽枯(후고) : 썩어가며 마르거나, 말라가며 썩는다는 뜻으로 원시의 ‘삭는’에 대한 한역어로 사용한 말이다.
* 遙見(요견) : 멀리서 보다, 멀리서 보이다, 아스라이 보이다. ※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吾先親(오선친) : 나의 선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 肩蓑(견사) : 어깨에 도롱이를 걸치다. / 向(향) : ~을 향하다, ~쪽으로 가다. / 雨途(우도) : 빗길.
[한역의 직역]
도롱이가랑비 실실 오는 추석날
오백 리 길이 안개 속에 먼데
불초가 오늘 돌아가지 못한
신덕(新德)에 옛집이 있네
금시서옥(今是書屋) 툇마루 아래
도롱이 한 벌 저절로 삭아가리
아스라이 보이네, 돌아가신 울 아버지
어깨에 도롱이 걸치고 빗길 향하시는 게
[한역노트]
이 시가 지어질 임시에 추석인데도 고향에 가지 못한 사람이 어디 시인 하나뿐이었을까만, 시인은 이렇게 시를 남겨 그해의 추석을 기념하였다. 술꾼이 생각 없이 TV 켜놓고 술로 허허로움을 달랠 시각에 시인은 시로 상념을 풀어냈으니, 혹시 이번 추석에 고향에 못 갈 독자가 있다면 시나 글로 마음 갈피를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설날의 눈[雪]과 함께 추석의 비[雨]가 때로 길을 막기도 하니, 시인이 추석에 고향 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어쩌면 추석을 앞두고 내린 비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중에 고생스럽게 먼 길 오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편히 쉬기를 애써 권한 모친의 간곡함이, 그 따스한 사랑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인이 비 내리는 추석 연휴 기간에 귀향하지 못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부곡(思父曲)’인 이 시가 지어지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정시(抒情詩) 범주에 드는 김승종 시인의 이 시를 좀 더 깊게 이해하자면, 몇몇 명사(名詞)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사용된 명사 때문에 시를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는 거의 없다 하더라도, 시에 쓰인 명사에 제대로 유의하지 않는다면 시의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다 가끔 마주하게 되는 고유명사 역시 어느 정도라도 해결하지 않고서는 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시에 쓰인 두 개의 고유명사인 ‘신덕(新德)’과 ‘금시서옥(今是書屋)’은 그 성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 당혹감을 자아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듯하다.
어느 독자가 신덕을 어딘가에 있는 동네 이름으로 파악하고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어디쯤에 있는 동네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단어까지 돌아보지 않는다면, 시를 정말 너무 띄엄띄엄 읽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시에 쓰인 ‘오백 리’를 단순히 먼 거리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고향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로 읽었다면, 어느 지역인지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오백 리’라는 말 역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명사라고 할 수 있다.
신덕은 서울에서 오백 리쯤 되는 안동(安東)에 있는 어느 마을 이름이고, 이 마을 안에 시인의 ‘옛집’이 있다. 그리고 ‘금시서옥’은 그 ‘옛집’에 부속된 시인 선친의 서재(書齋) 이름이다. 시인은 줌인(zoom in)의 기법으로 신덕에서 옛집으로, 옛집에서 금시서옥으로, 다시 금시서옥에서 금시서옥의 툇마루로, 툇마루에서 툇마루 아래의 도롱이로 우리의 시선을 끌고 간다. 그 시선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도롱이’ 역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명사이다.
우리의 눈길은 지금 툇마루 아래에서 삭아가는 도롱이 위에 머물고 있다. 시인은 왜 우리의 눈길을 여기까지 끌고 와 머물게 한 것일까? 비와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이 시의 핵심 소재가 된 ‘도롱이’에 자신의 생각을 집중시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의 제3연인 “돌아간 아버지의 어깨 / 어깨에 걸치고 빗길로 나선다”는 말이 기억이나 상상 속에서 길어 올려진 것 역시 이 도롱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도롱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쯤으로만 여겨야 하는 걸까? 이제 이 도롱이 위에 잠시 생각의 돋보기를 대보기로 하자.
삭아가는 도롱이는 무상하게 흐르는 세월에 대한 상징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징표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자식에 대한 근엄한 가르침의 단서로 보이기도 한다. 우중에 도롱이를 걸치고 들녘을 돌아보러 길을 나서시는, 기억이나 상상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본분과 근면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롱이에는 시인의 집안 내력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 하나가 숨어 있다. 도롱이를 나타내는 한자인 ‘사(蓑)’가 시인의 선친 아호(雅號)인 ‘정사(靜蓑)’에 쓰인 글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삭아가는 도롱이는 선친이 돌아가신 후로 흘러간 세월에 비례해 점점 옅어져 가는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초상(肖像)과 같은 소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역자는 시인이 아버지의 투영체인 도롱이를 보거나 생각하면서, 자식으로서 느꼈을 회한 같은 것도 이 시에 고요히 숨겨두었을 것으로 본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픈 자성(自省) 한 자락, 그것이 어쩌면 남겨진 자식인 시인이 행하고 있는 마지막 효도인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시에는 “비는 실실 오고 36”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기실은 “비는 실실 오고”가 연작시의 원제(原題)이고 “도롱이”가 부제(副題)였을 것이다. 비를 큰 범주의 소재로 삼아 최소한 36수 이상의 시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해 보자면, 시인이 비를 어지간히도 좋아하거나 비로 인하여 시상을 일으킨 경우가 유난히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만간 그 연작시 전체가 문세(問世)하기를 고대해 본다.
역자는 3연 6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칠언구와 오언구가 반반씩 섞인 8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다. 짝수구마다 압운하였으나 전반 4구와 후반 4구의 운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遐(하)’와 ‘家(가)’, ‘枯(고)’와 ‘途(도)’가 된다.
2023. 9. 26.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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