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부자' 김지운의 프롤로그-씁쓸한 인생, 달콤한 그 영화

[arte] 윤성은의 Cinema 100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김지운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비평에서도 흥행에서도 굴욕에 가까운 점수를 얻었던 ‘인랑’(2018)이후 5년만이다. ‘거미집’은 이미 크랭크업한 영화의 결말을 바꾸려고 재촬영을 감행하는 ‘김감독’(송강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영화를 찍어 가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 때 필연적으로 가미되는 연출자의 경험은 ‘거미집’에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인랑’과는 시대부터 톤앤매너까지 완전히 다른 이 영화를 통해 김지운은 감독이라는 일을 객관화하고 희화화시킨다. 그 여유로움과 능청스러움 때문에 웃음과 감동이 피어난다.
영화 '달콤한 인생'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1998)부터 ‘인랑’ 직전의 ‘밀정’(2016)까지, 한 편도 범작으로 취급할 수 없는 김지운 감독의 훌륭한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먼저 리뷰하고 싶은 영화는 ‘달콤한 인생’(2005)이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누아르 중 한 편이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겼고, 영화계에서 이병헌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연기한 ‘선우’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책임자가 되기까지 7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강사장’(김영철)을 보좌해온 충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강사장이 며칠 출타한 사이 감시하게 된 그의 어린 애인, ‘희수’(신미아)를 보고 야릇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것은 곧 강사장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달콤한 인생 스틸컷
보스의 여자에다 순수의 표상이면서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선우를 위험에 빠뜨리는 희수의 존재는 이 영화를 누아르에 갱스터의 컨벤션이 믹스된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든다. 사실, 희수에 대한 선우의 감정에 이입하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신은 몇 개 되지도 않고, 두 사람이 교감한다고 느낄 만한 순간도 거의 없다. 그저 선우가 검은 생머리카락이 드리운 희수의 흰 목덜미에서, 그녀가 연주하는 ‘로망스’의 선율에서 여태껏 그가 발을 들여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음이 암시될 뿐이다. 물론, 이런 장면들이 그가 강사장과의 결전을 앞두고 희수에게 그녀가 갖고 싶어했던 스탠드를 보낸다든가 죽어가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행동까지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희수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의 연정인지 혹은 환상에 불과한지 보다 중요한 것은 선우의 순수한 충정을 완전히 희수에게 돌리도록 만든 것이 강사장의 배신이었다는 점이다. 강사장의 배신은 선우에게 느낀 모욕감에 기인해 있고, 선우가 강사장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그를 홀린 희수의 묘한 매력 때문이다. 이렇듯 비록 분량은 적지만 희수는 ‘달콤한 인생’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핵심적 인물이다.
달콤한 인생 스틸컷
단순한 서사 대신 2시간 동안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미장센과 액션이다.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 감독의 세련된 영상 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모든 장면의 공간 구성과 미술이 교과서처럼 흠잡을 데가 없다. 일례로, 프롤로그를 제외한 영화의 첫 장면은 선우의 공간인 스카이라운지를 보여준다. 모던한 인테리어와 조용한 음악, 선우의 비싼 양복과 그의 앞에 놓인 초콜렛 무스가 상류사회의 달콤함을 맛보게 한다. 반면, 의자와 위스키바의 붉은 색은 선우의 또 다른 인생을 암시하는데, 이 붉은 색은 이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피의 빛깔, 그리고 희수의 스탠드 색으로 이어진다. 빨강은 화려함과 잔인함, 사랑과 복수의 이미지를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색으로, ‘달콤한 인생’ 미장센의 중요한 일부다. 위스키바 앞 쪽으로 버진로드처럼 뻗어 있는 조명길 또한 마지막 신의 미학을 위해 세팅되었다. 첫 장면에서 잰 걸음으로 이 통로를 걸어나갔던 선우는 마지막 신에서 다시 이 곳에 돌아와 무려 두 개의 조직을 소탕한 후 최후를 맞이한다. 카메라는 환한 조명길 위에 쓰러진 그의 클로즈업을 직부감으로 잡다가 서서히 회전하며 위로 올라가 풀 샷에서 멈춘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충분히 화려해 보이는 카메라 워킹이다. 여기서 선우가 양팔을 벌리고 대자로 뻗은 모습은 고전 누아르의 주인공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희수를 살려준 대가로 죽음을 맞게 된 그는 서구 문학에 등장하는 희생양적 원형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
‘달콤한 인생’ 이후, 김지운 감독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라스트 스탠드’(2013), ‘밀정’ 등 주로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찍어왔다. 그러나 이미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의 초기작들에서 보여주었듯 그의 재능은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미집’은 곧 육십갑자를 다 돌게 되는 중견감독이 영화라는 작업에 대해 쓴 중간 회고록 같은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그의 다음 행보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