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으로 쌓은 12세의 철탑,아빠와 함께라면 허물 수 있을까?

[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
영화 '스크래퍼'
▲영화 <스크래퍼> 메인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능숙한 솜씨로 집안을 꼼꼼히 청소하고(거미는 살려 둔다!) 깨끗해진 거실을 둘러보면 난 정말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불안도 걱정도 없다. 여기까지가 영화 <스크래퍼(Scrapper)>의 주인공, 12살 소녀 조지(롤라 캠벨)의 아침 일상이다. 이제는 자전거를 훔치러 갈 차례다.

노동계급의 이야기 속 유머를 전하는 샬롯 리건 감독

▲샬롯 리건 감독 특유의 키치한 연출이 돋보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스크래퍼>는 샬롯 리건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노동계급의 구체적인 일상이라는 소재만 놓고 보면, 영국 키친싱크 드라마의 계보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크래퍼>에는 텅 빈 주방, 낡은 집안 곳곳을 건조하게 응시하는 카메라가 없다. 무기력과 우울, 낙담과 절망도 없다.
대신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온 샬롯 리건 감독 특유의 역동적이고 발랄한 카메라 워크, 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유머, 각 공간과 인물들의 특징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색깔들이 연신 화면을 채운다. <스크래퍼>는 익숙하고 짐작 가능한 이야기를 아이의 관점과 상상력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그려낸다.

혼자 자라겠다는 아이와 그 주위 사람들

▲엄마의 죽음 후 비밀리에 혼자 살기로 결심한 조지(출처: 네이버 영화)
엄마가 죽은 후, 조지는 집에 혼자 남겨진다. 어른 없는 집에서 혼자 사는 아이라는 설정은 얼핏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5)와 겹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아무도 모르게’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갔다면, <스크래퍼>의 조지에게는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젓는 교사가 있고, 조지의 꾀에 보호자와 통화하고 있다고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사회복지사들이 있으며, 예사로 자고 가는 친구와 그의 다정한 엄마, 훔친 자전거를 사주는 단골 장물아비도 있다.이들은 카메라를 마주 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조지라는 인물과 행동에 대해 논평을 털어놓는다. 조지는 나름의 사회적 관계망과 교류 속에서 불량하고 되바라진 12살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영혼의 단짝 조지와 알리(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조지는 이따금 부정, 분노, 타협을 거쳐 우울, 수용으로 이어지는 슬픔 혹은 애도의 5단계가 적힌 쪽지를 중요한 지도인양 들여다본다. 자신이 겪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앞으로 어떤 감정이 닥칠지, 그리하여 언제쯤 마침내 괜찮아질지….

마음을 쿵쾅거리며 흔들고 지나간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고 남은 순서를 헤아리면서 친구 알리에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공유한다. 조지와 알리에게 마음이란, 육체를 여기 두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하지만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한 무엇 같다.

미성숙한 아빠와 다부진 딸이 가족이 되는 법

▲자신이 아빠라며 나타난 제이슨과 그가 못 미더운 조지(출처: 네이버 영화)
조지의 일상은 처음 보는 아빠 제이슨(해리스 딕킨슨)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아버지의 구재를 결핍으로 느껴본 적 없는 소녀에게 이 낯선 남자는 의심스럽고 새삼스럽고 몹시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게다가 제이슨은 믿음직스러운 보호자라기보다는 갑자기 어른의 역할을 맡아버린 어정쩡한 소년에 가깝다. 12살짜리 딸과 처음 만난 30살 아빠. 조지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잘 살 것 같고, 제이슨은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낼 것 같지 않다.

막연한 책임감으로 일단 찾아오긴 했지만,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한 제이슨은 조지의 곁에서 어색하게 서성인다. 조지는 제이슨에게 훔친 자전거의 차대 번호부터 지워야 한다는 요령을 알려주고, 경찰을 피해 함께 도망치면서 연대감을 형성하고 가까워지지만, 정말 조지에게 이런 아빠가 필요할까?
▲모은 고철들로 하늘까지 철탑을 쌓아 올리겠다는 조지(출처: 네이버 영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방. 조지의 계획대로라면 방학이 끝나기 전에 천정에 구멍을 뚫고 철탑을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내 조지에게 이 철탑은 미래이고 희망이며, 몸과 마음을 온전히 숨길 수 있는 안식처인 것만 같다.
그래서 관객들은 제이슨이 자물쇠를 자르고 몰래 방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조지의 판타지 대신 있는 그대로의 고철 더미를 바라보게 된다. 숨겨둔 것, 언젠가 치우고 비워내야 하는 것. 그래야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제이슨은 비로소 조지의 삶에서 자신의 쓸모를 깨닫는다.


함께라면 어쨌든 해피엔딩

▲영화 &lt;스크래퍼&gt; 메인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위악과 능청스러움을 동시에 품고 유치함과 연약함 사이를 오가는 롤라 캠벨의 얼굴은 <스크래퍼>의 서사에 진정성과 온기를 불어넣는다.

샬롯 리건 감독은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균형감을 유지하면서도 노동계급의 어린 소녀 이야기를 발랄한 코미디로 이끈다. 그래서 허술하고 엉성한 아빠와 되바라진 딸의 이야기는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이제 조지의 유년기에도 이빨 요정과 산타클로스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