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IT인사이드] 뒤러는 오픈AI를 고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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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IT과학부 기자독일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는 150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상대는 이탈리아의 유명 판화가인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와 달 에수스 출판사. 소송 이유는 다름 아니라 불법 복제였다.
뒤러는 미술사에서 몇 안 되는 살아 있는 동안 명성을 얻은 화가로 손꼽힌다. 처음으로 ‘퍼스널 브랜딩’을 도입한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이니셜 A와 D로 만든 독특한 모노그램을 서명으로 새겨 넣었다.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5000점 이상의 가짜 작품이 유통될 정도였다고 한다. 라이몬디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베껴 그린 것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뒤러의 서명까지 모방한 판화를 만들어 팔았고 참다못한 뒤러가 역사상 최초의 저작권 소송에 나선 것이었다.소송은 뒤러의 ‘일부 승소 판결’로 끝났다. 법원은 라이몬디가 뒤러의 모노그램을 모방한 것만 불법으로 판결했다. 하지만 작품을 베껴 그린 행위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심지어 뒤러에게 위조품이 나올 만큼 유명한 화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506년 베네치아서 저작권 재판
창작물에 대한 법적인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뒤러의 재판으로부터 200년도 더 지나서였다. 1710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인 ‘앤 여왕법(Statute of Anne)’이 제정됐다. 이 법은 기술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책을 손쉽게 복제할 수 있게 됐다. 뒤러의 그림을 모방하려면 뒤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그림 실력이 필요하다. 반면 활판 인쇄술의 등장으로 기계만 있다면 누구나 책을 복사해 팔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앤 여왕법도 이 같은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출판업자, 도서판매업자 할 것 없이 최근 들어 저작자의 동의 없이 글과 그림을 마음껏 찍어내 이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있어 저작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파멸로 몰고 있다”는 첫 문장에서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법이 최초의 저작권법으로 불리는 이유는 저자에게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물 보호를 위해 저작권 보호 기간을 14년으로 명시하고, 저자가 살아있을 경우 14년을 추가해 최대 28년을 보장해줬다.복제 개념 바꾼 생성 AI
최근 생성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저작권 개념도 송두리째 바꿔놨다. 이전까지는 원본을 얼마나 똑같이 베끼는지가 저작권 위반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반면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긁어모아 원본과 비슷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뒤러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뒤러가 그렸을 법한 새로운 그림을 생성한다. 워낙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는 탓에 출처도 찾기 어렵다.최근 미국의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원작자인 조지 R R 마틴을 비롯해 존 그리샴, 조디 피코 등 유명 소설가들이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오픈AI가 이들의 작품을 알고리즘에 공급해 챗GPT가 인간이 만든 것과 비슷한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챗GPT를 사용해 마틴이 쓰지도 않은 왕좌의 게임 원작인 ‘얼음과 불의 노래’ 속편이 챗GPT를 활용해 제작되기도 했다. 올해 1월 미국 창작자들이 이미지 생성 AI인 미드저니 개발사에 집단 소송을 제기한 것을 시작으로 생성 AI와 관련한 저작권 소송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AI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에 활용하는 양질의 데이터다. 하지만 그 데이터 역시 누군가 시간을 들여 만든 저작물이다. 기술 발전보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AI의 성능 향상을 좌우할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