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아줌마? NO! 한번쯤 지배당하고 싶은 여자, 양자경

[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양자경을 제대로 알기 위한 영화들
'검우강호'의 '500년된 돌다리 같은' 여자
아웅산 수치 여사와 100% 싱크된 '더 레이디'
62세에도 그윽한 눈으로 사랑을 말하는 '샹치와...'

"그윽하다"라는 우리말에 상응하는 유일한 여배우
95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의 양자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우아한 여자이다. 영어로는 graceful이고 한자로는 優雅이다. 불어는 élégance이다. 한글이든 영어든 한자든 그리고 프랑스어로든 다 있어 보인다. 품격이 있다. 우아함은 지성과 교양에서 나온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이나 CD보다 작은 얼굴, S라인 몸매는 짧게는 사흘, 길게는 3년 간다. 우아한 여자는 남자를 혹은 상대 파트너를 3년을 넘어 평생을 좌지우지한다. 우아한 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나이에 상관없이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홍콩과 중국, 할리우드에서 광폭 활동을 하고 있는 양자경은 이제 60이 넘었지만 아직 뭇 남성으로부터 대시의 대상이다. 그녀는 남자로 하여금 (이 여자라면)지배당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 '더 레이디' 공식사진
양자경에 대해 사람들은 요즘 죄 ‘에브리씽 에브리 웨어 올 앳 원쓰’를 얘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로 양자경은 할리우드 최고의 유리 천정이라고 했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기 때문이다. 할 베리 이후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 계 여성이 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양자경이 처음이다.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에브리씽 에브리 웨어 올 앳 원쓰’가 그렇게나 좋은 영화이고 기발한 영화인지는 약간의 호불호가 갈리고 여기서의 양자경의 연기가 최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그녀의 매력을 십분 살려 내고 있는 가는 의심스럽다. 뭐 그냥 세탁소 아줌마 캐릭터였으니까.양자경은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오히려 더 섹시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인다. 그건 몸을 되도록 감추는 무협물의 의상을 입고서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우습게 보는(?) 영화 ‘검우강호(劍雨江湖)’는 양자경이 어떠한 배우이고 어떠한 여자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2010년 작품이고 오우삼이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영화이다. 이때 양자경의 나이는 48살이었다. 상대역 배우는 30대 중반의 한국 배우 정우성이었다.
검우강호 스틸컷
나름 자기 복제가 심했던 오우삼의 영화인 만큼 ‘검우강호’도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페이스 오프(face off·단순한 성형이 아니라 얼굴 자체를 바꾸는 것)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뭐 사실 무협영화 자체가 말이 안되는 판타지이니까 상관은 없는 일이다…라고 오우삼은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 주인공(임희뢰)은 청부 암살업자이고 무림 고수이다. 그녀는 지니게 되면 최고 무술의 경지를 이루게 된다는 '달마의 유해'를 중간에 가로챈다. 그리고 얼굴을 바꾸고 다른 여성(양자경)으로 새로 태어난다. 다른 얼굴이 된 여자는 자신을 좇는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피하기 위해 잠수를 탄다.
그녀는 한 시골 마을에서 비단장사를 시작한다. 어느 날 그녀의 눈에 젊고 튼실한 남자(정우성)가 들어 오는데 지금으로 얘기하면 퀵 서비스 맨이다. 나이가 좀 있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비단장사 여자는 젊은 배달부를 데려다 멕이고, 입히고, 재우고, 안아 준다. 자, 근데 이런 식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
각설하고 극 후반에 남자가 여자의 가슴에 칼을 겨눈다. 여자는 남자를 똑 바로 바라보며, 그러나 부드럽게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껏 나를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나요?” 그러자 이 젊은 남자 칼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면서 소리친다. “난 당신을 한번도 사랑한 적 없어!”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인간,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입으로는 사랑한 적 없다고 한다. 그것도 굳이 또박또박 문장을 만들어 가며.(이때 정우성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곧 남자를 고수의 실력으로 제압해 잠시 정신을 잃게 한 후 악당의 수괴(왕학기)와 최후의 일합을 겨룬다. 여자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길을 선택한다. 이 영화에서는 돌 다리가 중간중간 인서트 컷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런 대사가 흐른다. ‘나는 하나의 돌 다리가 되어 500년동안 비와 눈을 맞으며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건너 가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양자경은 500년 된 돌다리 같은 여자이다.
2000년 '와호장룡' 개봉 당시 내한한 양자경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영화 ‘와호장룡’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작품이다. 양자경은 여기서, 주변의 젊은 여자(장쯔이)가 ‘들이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한 남자 리무바이(주윤발)를 늘 조용히, 옆에서, 오랜 시간을, 우아하게 지켜 보는 여자 수련으로 나온다. 푸른 여우의 독침을 맞고 남자가 죽기 전에 두 중년남녀는 손을 잡는다. 남자는 말한다. “주먹을 쥐면 그 안엔 아무 것도 없고 손을 펴면 모든 것을 쥘 수 있다오.” 여자는 그윽한 표정을 짓는다. ‘그윽하다’라는 순 우리말을 상응시킬 수 있는 여배우는 양자경밖에 없다. 드러내지 않고 깊고 평안한 표정을 보일 수 있는 여자는 살면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화 '더 레이디' 공식사진
2012년에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이 만든 ‘더 레이디’는 양자경의 우아한 미모가 최고조로 구현된 영화이다. 온 세상 영화계에서 가장 ‘못돼 처먹은’ 감독으로 유명한 뤽 베송이지만(이 영화로 부산영화제에 와서는 무대인사 중간에 나가거나 자신의 뚱뚱한 외모가 나오는 게 싫다며 사진기자들에게 촬영을 하지 말라는 둥 패악을 부렸다) 이 영화에서 양자경의 캐릭터 하나만큼은 제대로 뽑아 냈다. 감독은 감독이다. ‘더 레이디’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이야기이다. 일종의 바이오그래피 영화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현재 다시 가택 구금 사태에 처해져 있지만 잠시 실권을 쥐었을 때(외교부 장관과 대통령 고문이었다. 수치 여사는 고인이 된 남편이 영국인이고 영국 국적을 지니고 있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로힝야 족 학살 사건을 묵인하는 바람에 국제적 신망을 다소 잃은 상태이긴 하나 여전히 미얀마의 인권 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더 레이디’를 보고 있으면 수치 여사로 분한 양자경의 싱크로율이 거의 백프로에 가까워 놀라게 된다. 아웅산 수치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양자경밖에 없다.
영화 '더 레이디' 공식사진
양자경을 논할 때 ‘예스 마담’을 얘기하는 자 다 배신자(?)이다. 영화를 겉핥기로 아는 자들이다. ‘송가황조’같은 영화를 거론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영화의 송애령 역은 양자경이 늘 점잖고 우아한 맏이 역할에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는 너무 돈이 많은 싱가폴 여성으로 나와 본래 이미지와는 좀 달라 보였으나 우아하다는 건 어쩌면 ‘돈이 받쳐줘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 대목이기도 했다. 금방 잊혀진 영화 ‘건 파우더 밀크 셰이크’에서도 총격 액션을 (과거 샘 페킨파 감독이 보여줬던) 총격 발레의 느낌으로 선보인다. 양자경은 여기서 웨이트리스 복장으로 앞치마를 입고 샷건과 소총을 쏴댄다. 폭력적이라기 보다는 이상하게도 중후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양자경은 평생을 잊지 못하는 과거의 여인 이미지이다. 이상한 미중 합작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자경은 오래 전 연인인 양조위와 오랜만에 만나 죽을 듯이 일합을 겨루며 싸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양자경은 남자를 죽이지 않는다. 그것도 결국 죽을 듯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자, 양자경이 물을 것이다. “나를 한번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나요?” 그것도 그윽한 눈빛으로.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녀 앞에 서면 그녀의 62세라는 나이는 잠시 까먹게 될 것이다. 사랑엔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진부하지만 맞는 얘기이다.
영화 '더 레이디' 공식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