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애인 생겼다"…동거녀 정신병원에 12년간 입원시킨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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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
비운의 천재로 미화됐지만
사생활은 지저분하고 무책임
위대한 작품 뒤에 숨겨진 이야기

남자는 성공한 예술가이자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고요. 남자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슬퍼하는 남자를 위로하면서 둘의 사랑은 시작됐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마치 새 아내처럼 대했습니다. ‘곧 정식으로 청혼하겠지.’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4년이 지나도록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그렇게 속을 태우던 어느 날, 그녀는 남자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자에게 “결혼 약속을 어겼다”며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긴 덕분에 매년 적잖은 보상금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오빠와 이웃들을 구슬려 정신병원 강제 입원 동의서를 받아왔고, 그녀를 병원에 가둬버렸습니다.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간신히 나올 수 있었던 그녀. 또다시 남자를 고소했지만 가엾게도 결과를 보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불행은 알고 보면 대부분 자신이 자초한 일이거든요. 게다가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민폐를 여럿 끼쳤습니다. 오늘은 렘브란트 작품과 삶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명암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림이 다소 어두워서 모바일로 보신다면 화면을 밝게 하고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야심 찬 천재, 젊어서 성공하다
렘브란트가 태어난 17세기 초는 네덜란드 경제·문화의 황금기였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네덜란드’라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때였지요. 당시 영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실린 기사 60~70%가 네덜란드 관련 뉴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덕분에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꽤 먹고살 만했습니다. 특히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그의 자신감은 20대 중반부터 작품에 ‘렘브란트’라고만 서명한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렘브란트는 성이 아니라 이름(퍼스트 네임)입니다. 조 바이든(바이든), 파블로 피카소(피카소) 등 대부분의 서양인이 성(라스트 네임)으로 불리는 걸 생각해보면 좀 특이하지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교황, 라파엘로, 훗날의 나폴레옹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 중 렘브란트가 일종의 ‘롤 모델’로 삼은 건 르네상스의 미술 거장 라파엘로였습니다. 자신이 서양 미술사 최고의 거장 중 한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었지요.
부엌에서 머리채 잡은 남녀, 왜?
렘브란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창의적이고, 승부욕이 강하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천재였지요.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이는 고집이 세고, 손해 하나 보는 일 없이 사사건건 이기려고만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나 말을 하는 데다, 남의 눈치까지 안 보는 괴팍한 인간이었습니다.하지만 렘브란트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 집안의 재정 형편은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결혼 직후부터 렘브란트의 작품 수입이 급감했습니다. 신혼을 즐기느라 작품 생산량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돈 되는 그림’인 초상화 대신 당시 ‘진정한 예술’로 평가받던 역사화를 그리게 된 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렘브란트는 ‘이제 자리도 잡았고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역사에 남을 그림을 그려보자’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중요한 것. 유행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쁜 그림’을 좋아하게 됐거든요.
불운도 따랐습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이도 넷이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중 세 명이 출생 직후 사망했습니다. 사스키아의 건강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계속 악화됐습니다. 그 탓에 사스키아는 티튀스라는 이름의 어린 아들 하나만 남긴 채 1642년 2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안 있어 렘브란트는 가정부로 일하던 헤이르티어와 사랑에 빠져 같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헤이르티어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렘브란트는 또 새로 들어온 신참 가정부인 헨드리케와 바람이 났습니다. 집안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고 합니다. 1649년 네덜란드 법원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거든요. “부엌에서 렘브란트, 헤이르티어, 헨드리케, 그리고 이웃 여성 한 명이 참관한 가운데 매우 시끄럽고 추악한 장면이 벌어졌다.”
최악의 빚쟁이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한 평판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화풍은 유행에 뒤떨어졌고, 그림 그리는 속도는 너무 느려서 “배송 언제 오냐”는 고객들의 불만이 빗발쳤습니다. 지저분한 사생활도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큰 고객이었던 얀 식스가 선거에 출마하면서 렘브란트를 ‘손절’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신에게도 렘브란트의 안 좋은 이미지가 덧씌워질까 봐 그림 주문을 끊었거든요.하지만 렘브란트는 길거리에 나앉지 않았습니다. 현란한 ‘빚 떼먹기’ 기술을 쓴 덕분입니다. 그는 먼저 경매를 열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술품과 골동품을 전부 판 뒤 거액의 현찰을 헨드리케와 아들에게 넘겼습니다. 이 돈은 한 푼도 빚 갚는 데 쓰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렘브란트는 경매를 여느라 빌린 장소의 임대료조차 주지 않고 떼먹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빚 독촉을 받지 않도록 파산 신청을 해버렸습니다.
그 후 헨드리케와 아들은 자신들의 명의로 미술 공방을 열고 렘브란트를 고용했습니다. 이로써 렘브란트는 빚을 한 푼도 갚지 않으면서도 자기 재산을 고스란히 쓰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봐도 대단한 꼼수입니다.
빛과 어둠의 아이러니
사생활이 어쨌든 간에 오늘날 렘브란트는 서양미술 사상 최고의 거장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렘브란트 전문가인 스테파니 디키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문화 어느 분야를 봐도 렘브란트가 있어요. 시트콤 ‘프렌즈’ 주제가를 부른 그룹 이름이 렘브란트(The Rembrandts)입니다. 영화계에서는 ‘렘브란트 같다’고 하면 ‘과하게 회화적이다(그림 같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렘브란트라는 이름의 치약도 있지요. 하필 어두운 색조로 유명한 렘브란트의 이름을 따서 치약 이름을 붙인 게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만큼 렘브란트가 ‘높은 품질’의 상징이라는 뜻일 겁니다. 렘브란트 작품을 코앞에서 보고도 못 알아볼 사람들조차 렘브란트라는 이름을 알아요. 렘브란트는 위대함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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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의 내용은 렘브란트 반 레인(미하엘 보퀘뮐 지음, 김병화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 Rembrandt: A Life(Charles L. Mee Jr. 지음), Rembrandt's Eyes(Simon Schama 지음) Rembrandt: The Painter at Work(Ernst van de Wetering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