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뮤지엄 한가운데 대자로 드러누운 '침 뱉는 분수'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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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뮤지엄 - 오스틴 리: 패싱 타임

무라카미 다카시도 반한 '컴퓨터 덕후'
아이패드·3D 프린터로 만든 조각·회화 눈길
"예술가는 권투선수처럼 전력을 다해야 성공"
파란 바닥에 사람이 큰 대자처럼 누워 있다. 그의 입에서는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쪼르륵' 하고 나온다. 이 작품의 이름은 다름 아닌 '분수'. 상상을 깬 분수 앞에는 긴 벤치도 가져다 뒀다. 마치 공원에서 분수를 감상하듯 관객들에게 명상을 하라고 공간까지 마련한 것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하는 작가, 오스틴 리가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 떴다. 자신의 한국 첫 전시회 '오스틴 리: 패싱 타임'을 통해 관객들과 마주한다.
오스틴 리는 '컴퓨터 덕후'로, 신기술을 작품에 적용한 작가로 젊은 세대에 잘 알려진 작가다. 그가 밑그림을 구상할 때 자주 쓰는 작업 도구는 연필과 펜이 아닌 아이패드와 VR이다. 아이패드로 선을 그리며 스케치를 하거나, VR 기기를 직접 쓰고 모션 캡처 수트를 입은 채 몸을 움직이며 작품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그 이후 캔버스에 에어브러시로 아크릴 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회화라기보다는 컴퓨터 그래픽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남들과 다른 리의 작업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각광받았다. 특히 애플의 컴퓨터 '맥'의 대기 중 화면인 무지개를 형상화해 작품을 만드는 등 심오한 주제가 아닌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작품 세계로 옮겼다는 점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MZ세대 컬렉터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도 그의 매력에 반해 자신의 갤러리 카이 카이 키키에서도 개인전을 열어줬다. 미국 대표 큐레이터 제프리 다이치의 갤러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롯데뮤지엄 전시를 위해 리는 특별히 작품에 맞춰 재생되는 음악들도 직접 컴퓨터를 통해 만들었다.
그가 내놓는 조각들 또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직접 조각한 것이 아니라 3D 프린터로 만들어졌다. 때에 따라서는 조각을 이루는 마디마디를 인쇄해 덩어리처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거푸집만 프린터로 만든 후 그 안에 재료를 채워넣는 방식을 택했다.
마치 인간이 전시장을 걸어 나가는 듯 생생하게 표현된 조각 '워크', 엄청나게 큰 무지개 앞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 작품 '미스터 오스틴'은 대형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3D프린터로만 작업이 이뤄졌다. 파란색 인간이 앉아 머리에 손을 올린 조각 작품 '블루 릴랙스'는 리의 작업적 특징이 모두 드러나 있다. VR로 움직이며 스케치 밑작업을 한 후 3D 프린터로 조각의 손, 발 얼굴 등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그래서 조각은 그 표면이 매끄럽기보다는 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은 형태가 됐다.

미술관 중간중간 관객들로 하여금 앉아 쉬어갈 수 있게 만든 벤치와 의자들도 모두 리가 3D 프린터를 통해 만든 작품이다. 관객들은 실제로 동영상을 보고 작품을 감상할 때 그의 작품인 의자에 앉아볼 수 있다.
다음 전시관인 '갈등과 도전' 속 작품에서 다뤄진 모든 인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권투선수'라는 것. 어떤 복서는 두 손을 든 채로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복서는 링 위에 걸쳐진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작품만 보면 이 선수가 과연 이겼는지, 또 졌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지친 채 쓰러졌다. 리가 작품의 주제로 권투 선수를 택한 데는 자신의 과거 영향이 크다. 그는 미술을 배우기 전 체육관에서 일하며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활동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리의 인생에 커다란 경험이 됐다. 그가 한 관 전체를 털어 복서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는 작품들을 건 이유다. 그는 전시장 앞에서 "권투와 예술은 닮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어떤 일이든 성취에 이르기 위해서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술 세계에 들어와서도 리는 자신의 작품에 보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의 과정을 거쳤다. 이 시간을 겪으며 그는 운동선수 생활과 작가 생활이 전력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고 느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대·MZ 작가'로 불리지만 예상 외로 리는 거장들의 작품을 오마주한 작품들을 많이 내놓는다. 이번 전시에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과 그림들이 나왔다. '정반사' 시리즈 중 하나로 나온 그림은 마크 샤갈이 에세이집에 그린 그림을 본따 '오스틴 리만의 기법'으로 다시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코로나 속 인간의 우울, 고립감을 표현했다. 현대를 덮친 팬데믹을 옛 거장의 작품을 통해 재해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에 나온 리의 '워리어'라는 조각은 보자마자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를 만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 작품 또한 로댕의 작품을 오마주해 만들었다. 역시 3D 프린터로 조각의 거푸집을 만들고 그 안에 청동을 채우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기쁨을 의미하는 '조이' 관에 크게 걸린 동명의 작품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새롭게 차용했다. 형광빛 분홍 색깔로 표현된 사람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에어스프레이를 뿌린 후 일일이 사람 모양대로 스티커를 떼어내듯 작업했다. 그래서 파스텔처럼 가장자리가 번지기 쉬운 에어브러시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경계가 매우 깔끔하다는 게 특징이다.

나가는 커튼을 열기 직전에 마주한 방은 세 면의 벽이 모두 몰입형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졌다. '플라워 힐'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에는 이름 그대로 동산에 붉은 튤립들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꽃들에는 모두 눈 코 입과 손발이 달렸다. 이들은 마치 애교를 부리듯 손으로 볼을 감싼 채 씰룩거리며 춤을 춘다. 동산에는 시간에 따라 해가 떠오르고, 또 해가 지면 전시장 전체가 한밤중처럼 깜깜하게 변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2023년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짧은 동영상에서 확장됐다. 이 전시가 12월 31일까지 진행되기 때문에, 작품 속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2024년 새해를 맞이하라는 리의 신박한 의도가 담겼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