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 상승한 르네상스 예술가들, 그 뒤엔 고리대금업자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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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 배경 영화를 보면 인간과 유인원 중간쯤의 존재들이 동굴 안에 모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간다. 오래된 편견으로 근거 없는 설정이다. 빙하시대 절정기를 제외하면 인류는 대부분 넓게 트인 곳에서 생활했다.
그럼 동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저장소이자 집회나 예식을 치는 장소 그도 아니면 별장이었다. 동굴은 오랫동안 사물을 보존하는 데 적합하다. 자연히 원시 인류 유산의 대부분이 동굴에서 발견됐고(들판에서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때문에 우리는 선사시대 인류가 동굴로 주택문제를 해결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동굴마다 빠지지 않는 게 벽화다. 보통은 동물이 오브제인데 몸통마다 돌로 찍은 흔적이 있다. 두 가지 설이 있다.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와 너무나 잡아먹고 싶은데 사냥감의 속도며 중량에 절망한 끝에 군침만 흘리며 벌인 정신 승리였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음향적으로 가장 울림이 깊은 곳에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동굴의 용도가 주거가 아닌 예식 등등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무리 중에 가장 귀가 예민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 즉 예술가였을 것이다. 보통 2인 1조로 작업을 했는데(가정이다) 음향 담당이 미술 담당에게 동굴 이곳저곳에서 소리를 질러보라 한 후 장소를 확정하면 미술 담당이 벽에 들소를 그렸다.
가장 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공간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제사장이었고 예술가는 하잘것없는 무대와 소품 책임자였다(이문열의 소설 ‘들소’에는 원시 예술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이 종속관계는 중세의 교황과 예술가들에까지 유구하게 이어진다. 교회는 서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았고 예술가들은 먹고살기 위해 그들의 선배들처럼 기능공이 되었다. 시키는 대로 묘사하고 깎던 예술가들이 독립적인 존재로 서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르네상스다. 예술가들이 성취한 위업이 아니었다(이들은 단결해서 뭘 하기에는 심성이 좀스럽고 협동의식이 제로다).
주연은 상업을 겸한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군주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이들에게 돈을 빌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포로들의 몸값을 내기 위해 또 돈을 빌렸다. 이렇게 군주에게 돈을 빌려준 인물들 중 하나가 예술가의 지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변화시킨 코지모 메디치다.
그는 세상에서 돈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돈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코지모도 눈치는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는 엄지를 세우지만 뒤에서는 중지를 들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예술에 약간의 취미가 있었고 이것이 후일 무소불위의 메디치 제국을 건설하는 시발점이 된다. 사다리는 생겼지만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속도는 느렸다. 그들을 내내 장인 취급했던 교회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교회의 예술가 길들이기 수법은 돈 장난이었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사제들은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라는 조각가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용역비는 금화 5600플로린이었는데 문제는 선수금이 겨우 150플로린이었다는 사실이다(1플로린은 지금 가치로 80만원 정도). 45억원 짜리 공사를 발주하면서 계약금을 1억원 조금 넘게 준 것이다.
이 돈으로 야코포는 돌도 사고 운송도 하고 조수들 인건비도 지불해야 했다. 결국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야코포는 ‘알바’를 뛸 수밖에 없었는데 계약서에는 그가 작업에 복귀하지 않을 때마다 선불금의 일부를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었다. 교회의 계교는 야코포의 천재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를 찾는 곳은 너무나 많았고 돈 걱정이 없었던 야코포는 계약 조항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코포를 놓칠 수도 없었던 교회는 결국 ‘갑질’을 포기하고 ‘아, 옛날이여’를 구슬프게 부르는 처지가 된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장 세게 받은 사람이 미켈란젤로다. 코지모의 손자인 ‘위대한’ 로렌초의 양자로 들어가 고가인 대리석을 마음껏 주물렀고 그 나이에서는 쳐다볼 수도 없는 저명한 인물들을 로렌초의 양자라는 이유로 다 만났다.
그런데 이 미켈란젤로, 코지모의 아들이 집안을 말아먹고 피렌체에서 쫓겨나자 메디치 가문을 축출한 피렌체 공화국이 의뢰한 동상 제작을 덜컥 수락한다.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라는 신념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한 그는 제작비에 ‘논란 비용’까지 포함시켰다. 비난을 감수할 테니 그걸 돈으로 환산해달라는 요구였다. 미켈란젤로에 대해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미켈란젤로는 불안했다. 혹시라도 메디치가가 복귀하면 자신의 안녕을 장담하기 어렵다.
실제로 우려하던 그 일은 일어났고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하였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시골에 숨어살아야 했다. 교회의 하청업자였던 예술가들은 이렇게 화려하게 독립했고 심지어 정치적인 선택까지 할 수 있는 존재로 격상했다. 그럼 이들 미술 스텝과 함께 동굴 벽화를 만들었던 음향 담당들은 언제, 어떻게 독립을 했을까. 다음 회로 이어진다.
그럼 동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저장소이자 집회나 예식을 치는 장소 그도 아니면 별장이었다. 동굴은 오랫동안 사물을 보존하는 데 적합하다. 자연히 원시 인류 유산의 대부분이 동굴에서 발견됐고(들판에서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때문에 우리는 선사시대 인류가 동굴로 주택문제를 해결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동굴마다 빠지지 않는 게 벽화다. 보통은 동물이 오브제인데 몸통마다 돌로 찍은 흔적이 있다. 두 가지 설이 있다.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와 너무나 잡아먹고 싶은데 사냥감의 속도며 중량에 절망한 끝에 군침만 흘리며 벌인 정신 승리였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음향적으로 가장 울림이 깊은 곳에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동굴의 용도가 주거가 아닌 예식 등등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무리 중에 가장 귀가 예민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 즉 예술가였을 것이다. 보통 2인 1조로 작업을 했는데(가정이다) 음향 담당이 미술 담당에게 동굴 이곳저곳에서 소리를 질러보라 한 후 장소를 확정하면 미술 담당이 벽에 들소를 그렸다.
가장 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공간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제사장이었고 예술가는 하잘것없는 무대와 소품 책임자였다(이문열의 소설 ‘들소’에는 원시 예술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이 종속관계는 중세의 교황과 예술가들에까지 유구하게 이어진다. 교회는 서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았고 예술가들은 먹고살기 위해 그들의 선배들처럼 기능공이 되었다. 시키는 대로 묘사하고 깎던 예술가들이 독립적인 존재로 서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르네상스다. 예술가들이 성취한 위업이 아니었다(이들은 단결해서 뭘 하기에는 심성이 좀스럽고 협동의식이 제로다).
주연은 상업을 겸한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군주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이들에게 돈을 빌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포로들의 몸값을 내기 위해 또 돈을 빌렸다. 이렇게 군주에게 돈을 빌려준 인물들 중 하나가 예술가의 지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변화시킨 코지모 메디치다.
그는 세상에서 돈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돈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코지모도 눈치는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는 엄지를 세우지만 뒤에서는 중지를 들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예술에 약간의 취미가 있었고 이것이 후일 무소불위의 메디치 제국을 건설하는 시발점이 된다. 사다리는 생겼지만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속도는 느렸다. 그들을 내내 장인 취급했던 교회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교회의 예술가 길들이기 수법은 돈 장난이었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사제들은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라는 조각가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용역비는 금화 5600플로린이었는데 문제는 선수금이 겨우 150플로린이었다는 사실이다(1플로린은 지금 가치로 80만원 정도). 45억원 짜리 공사를 발주하면서 계약금을 1억원 조금 넘게 준 것이다.
이 돈으로 야코포는 돌도 사고 운송도 하고 조수들 인건비도 지불해야 했다. 결국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야코포는 ‘알바’를 뛸 수밖에 없었는데 계약서에는 그가 작업에 복귀하지 않을 때마다 선불금의 일부를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었다. 교회의 계교는 야코포의 천재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를 찾는 곳은 너무나 많았고 돈 걱정이 없었던 야코포는 계약 조항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코포를 놓칠 수도 없었던 교회는 결국 ‘갑질’을 포기하고 ‘아, 옛날이여’를 구슬프게 부르는 처지가 된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장 세게 받은 사람이 미켈란젤로다. 코지모의 손자인 ‘위대한’ 로렌초의 양자로 들어가 고가인 대리석을 마음껏 주물렀고 그 나이에서는 쳐다볼 수도 없는 저명한 인물들을 로렌초의 양자라는 이유로 다 만났다.
그런데 이 미켈란젤로, 코지모의 아들이 집안을 말아먹고 피렌체에서 쫓겨나자 메디치 가문을 축출한 피렌체 공화국이 의뢰한 동상 제작을 덜컥 수락한다.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라는 신념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한 그는 제작비에 ‘논란 비용’까지 포함시켰다. 비난을 감수할 테니 그걸 돈으로 환산해달라는 요구였다. 미켈란젤로에 대해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미켈란젤로는 불안했다. 혹시라도 메디치가가 복귀하면 자신의 안녕을 장담하기 어렵다.
실제로 우려하던 그 일은 일어났고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하였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시골에 숨어살아야 했다. 교회의 하청업자였던 예술가들은 이렇게 화려하게 독립했고 심지어 정치적인 선택까지 할 수 있는 존재로 격상했다. 그럼 이들 미술 스텝과 함께 동굴 벽화를 만들었던 음향 담당들은 언제, 어떻게 독립을 했을까. 다음 회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