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림만을 사랑했던 장욱진…'가장 진지한 고백'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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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회고전어떤 화가는 신화가 된다. ‘국민 화가’ 이중섭과 박수근이 그랬다. 아름다운 작품 뒤에 숨은 불우한 삶과 비극적인 최후가 이들의 이름에 일종의 신성한 권위를 더했다. 또 다른 국민 화가 김환기도 마찬가지다. 교수직을 내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파리, 뉴욕으로 떠나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이력, ‘신화적 작품값’이 그의 아우라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우주’가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세운 한국 미술 최고가 기록(약 132억원)은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미술 영재'
6·25 겪으며 현실의 참혹함 보고
정반대의 동심 가득한 화풍 정착
스스로 "나는 심플하다" 소개
작품과 가족만 바라보고 살아
자신의 죽음도 그림에 녹여내
장욱진(1917~1990)은 다르다. 그에게 비극적 신화는 없다. 가족은 화목했고 삶도 비교적 평탄했다. 예쁘고 작고 동심 어린 그림, 큰 키에 헐렁한 옷을 걸치고 술을 마시는 기인 등 장욱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친근하다. 그런데도 그는 앞서 말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비결이 뭘까.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은 그 해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다. 1930년대 학창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평생 그린 시기별 주요작이 270여 점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려 뽑은 작품을 통해 장욱진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여다봤다.
“그림 그리기를 밥보다 즐겼다”
장욱진은 술을 많이 마시기로 유명하던 화가다. 도인 같은 인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림도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장욱진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그림을 그린 화가다. 학생 때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엘리트 미술 영재’로 인식됐다. 화가를 꿈꾸며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이렇게 쌓은 실력으로 주요 학생작품전에서 상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1938년 그의 어머니는 장욱진의 입상 기념 인터뷰에서 아들을 “그림 그리기를 밥보다 즐기는 아이”라고 표현했다.이 시기 상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된 ‘공기놀이’(1938)다. 이 작품을 비롯한 장욱진의 초기작에서는 데생과 구성 등 탄탄한 기본기가 돋보인다. 그와 같은 시기 경성제2고보를 다닌 유영국 화백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고교 때부터 장욱진은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전쟁통에 자신만의 화풍 꽃피워
고교를 졸업한 장욱진은 일본 제국미술대(현 무사시노미술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당시 최신 서구 미술 사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졸업 후 귀국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유학 시절 동료 화가인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해 동인 활동을 하며 ‘한국적 근현대미술’을 탐구한 것도 이때다.그러다 6·25전쟁이 발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욱진의 작품에서 소박한 아름다움과 동심, 서정이 가득한 특유의 화풍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게 이때다. 부산 피란생활과 종군 화가 생활로 겪은 참혹한 현실이 정반대의 작품세계를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홀로 걷는 ‘자화상’(1951)이 단적인 예다.전쟁이 끝난 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된 장욱진은 몇 년 안 돼 사임하고 전업작가가 됐다. 1963년 덕소 북한강변에 화실을 지은 뒤 1975년까지 12년간 작업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공업 장인처럼 그림만 그리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당대 미술계의 조류를 작품세계에 반영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전통 서예에서 영감을 얻은 문자 추상작품 ‘반월·목(半月·木)’(1963), 추상화인 ‘눈’(1964)이 대표적인 사례다.
심플하고 진실된 삶
장욱진은 생전 “나는 심플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작은 화면에 이 세상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였지만, 생업(그림)과 가족에 충실하며 정직한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가족을 표현한 그림이 유독 많은 것도 삶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장욱진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림에 묘사된 자신의 체형이 조금씩 커졌다는 점이 재미있다. 예컨대 초기 가족도에 그려진 화가는 말랐지만, 1981년작 ‘가족’에서는 푸근한 체형이다. 이 무렵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가족에게 당당해진 자아상이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대표작 ‘진진묘’(1970)는 불교적 세계관을 다루면서도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내에게서 느낀 숭고한 영성을 보살의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라서다. 진진묘는 ‘참으로 진실하고 오묘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죽는 날까지 놓지 않은 붓
그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은 없다. 난 나의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나를 녹여서 넣는다. 나를 드러내고 발산하는 그림처럼 정확한 놈도 없다.” 전시 제목인 ‘가장 진지한 고백’처럼 장욱진에게 그림은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말년의 그가 재료와 화풍에 구애받지 않고 조화로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수십년간 창작에 전념한 끝에 얻은 성과다. 나무 표현에 파격적인 수묵화 기법을 쓴 작품 ‘나무와 가족’(1982)이 대표적인 예다.장욱진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그림에 녹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린 ‘밤과 노인’이 그 결과물이다. 작품 속 화가는 오랫동안 그려온 풍경을 뒤로 하고 밤하늘에 떠 있다. 그림 외길 끝에 도달한, 모든 집착을 떠난 초연함의 경지. 그 성취야말로 괴팍한 성질이나 운명적인 불행 같은 ‘클리셰’ 없이도 이룩해낸 ‘신화적 경지’였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