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말과 글의 새길을 내기 위한 노력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유 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국경일을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한글날을 맞을 때마다 늘 자랑스럽다. 고유 문자를 가진 나라도 몇 안 되겠지만 문자 창제 배경에 관한 상세한 기록물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한글날이 고마운 이유는 또 있다. 매년 한글 창제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 말글살이의 현주소를 짚어볼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한글날 내려지는 우리 말글살이의 진단 결과는 보통 부정적이다. 외래어가 범람하고 신조어와 유행어가 판치는 현실 개탄이 주를 이룬다. 이는 문자와 언어를 혼동해 ‘한글 파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의 말글살이는 늘 우려의 대상이기만 한 것일까.이번 한글날에는 말과 글의 새길을 내기 위해 애쓰는 국내 통신사들의 노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통신 3사는 사용자 편의를 중심에 둔 쉬운 말, 감수성을 갖춘 바른 말을 사용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 시작은 LG유플러스였다. 2017년부터 ‘고객 언어 가이드북’을 발간하며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작년 한글날에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언어의 정체성을 ‘진심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했다. SK텔레콤도 작년 한글날 쉬운 통신 용어와 사회적 감수성에 맞는 바른 말을 쓰겠다며 <사람 잡는 글쓰기 2>를 출간했다. KT 또한 통신 상담 용어를 쉬운 말로 재정비하고 ‘고객 지향 용어 개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통신사의 이런 노력에 주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작년 봄 한 통신사가 보낸 진심 어린 조언 요청 편지 덕분이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자문 회의에 참석하며 말과 글의 새길을 만들어가는 진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고객 중심’을 구호가 아니라 표현 하나하나를 통해 구체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고민과 노력은 깊고 진지했다. 통신사 이용자는 배경이 매우 다양하다. 모두에게 닿을 수 있으려면 쉽고 편안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어려운 통신 용어를 더 쉬운 말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부터 표현 하나하나에 고객 중심을 실천하고자 하는 고민까지 다양한 논의가 필요했다.

자문의 1차 결실은 언어 지침서 새판 출간과 기업이 추구하는 언어 스타일을 지칭하는 이름을 만든 것이었다. 지침서 새판은 기존 판본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했다. 지침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편을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라는 방어적인 표현을 버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공급자를 주어로 하는 생색내기식 표현인 ‘~을 제공해 드립니다’ 대신에 ‘~을 이용할 수 있어요’와 같이 표현한다. ‘혜택’이라는 표현으로 두루뭉수리 퉁치지 않고 혜택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정확히 기술한다.

말과 글의 새길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이 나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그 길에 동참하면서 더 넓고 탄탄한 길이 된다. 한 통신사의 새길 내기가 다른 통신사의 동참을 끌어낸 것처럼 말이다. 이번 한글날에는 말과 글의 새길을 내기 위한 노력을 찾아 응원을 보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