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사라져도 남아있는 폭력의 굴레…연극 '지상의 여자들'

폭력을 가하는 남성이 사라진다는 설정의 SF 연극…시각적 효과 돋보여
지방의 작은 도시 구주에 작은 운석이 떨어진 뒤 남성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하늘로 날아갔다"는 남성들의 사례를 모아보니 그들은 여성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건이 되풀이되자 지상에 남은 여자들은 그간 억눌러왔던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한다.

7일 서울 정동극장 세실에서 개막한 연극 '지상의 여자들'은 공상과학(SF) 장르를 표방하지만, 작중 비현실적 장치는 하나뿐이다. 남성들이 하늘로 떠올라 흔적 없이 사라지는 현상을 제외한 모든 사건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

구주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한국의 여느 마을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마을에 떨어진 운석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동상과 크림빵은 흔히 볼 수 있는 조형물을 연상시킨다. 인물들 역시 어딘가 친숙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 성연을 구박하는 시어머니는 과장된 말투부터 아들을 챙기는 모습까지 못된 시어머니의 전형이다.

성연의 논술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욕설이 절반인 대화를 나눈다. 작품은 남성이 사라진 구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순차적으로 묘사한다.

구주에 남은 여성들은 폭력 없는 구주가 된 것을 기뻐하지만. 이내 여성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쥐기 위한 갈등이 시작된다.

서울로 출장을 떠난 남편이 있는 성연은 친구 희수로부터 '폭력의 가해자인 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이라는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진다.
전인철 연출은 폭력이 가해지는 순간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특히 인물이 욕설과 혐오 발언을 여과 없이 내뱉는 등 언어 묘사가 현실적이다.

전 연출은 폭력으로 인한 고통의 흔적은 가해자가 사라진 뒤에도 남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가해자가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를 탓하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성들의 폭력이 사라진 뒤로는 또 다른 양상의 폭력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거 피해를 보았던 여성들은 남성과 어울리는 여성을 해코지하고, '사라진 남성의 생명을 애도한다'는 온건한 주장을 펴는 성연은 여론의 뭇매를 맞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무기력한 감정이 객석으로 전해진다.

성연은 무대 밖으로 '폭력의 굴레를 끊어야 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관객에게 직접 나눠주며 애처로움을 더한다.
연극은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흰 무대에 목탄으로 글과 그림을 남기며 다양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무대는 사라진 남성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고, 성연이 생각을 정리하는 칠판이 되어 관객의 상상을 돕기도 한다.

인물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휴대전화로 촬영한 영상을 실시간으로 무대에 투사해 연출의 생동감을 높였다.

특정 장면에서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남성의 모습을 180도 회전시켜 하늘로 떠오르는 것처럼 연출했다.

간단한 무대장치지만 배우의 겁에 질린 연기가 더해지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고통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현실적인 연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하늘로 날아갈 수 있다는 말에 겁에 질린 남성들이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너도나도 웃음 치료를 받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만 남성 인물들을 단편적으로 묘사한 점은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다.

전 연출은 5일 기자간담회에서 "작년 낭독 공연 당시 불편함을 드러내는 남성 관객들도 있었다"며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공연은 12일까지 이어진다. 제23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프로그램으로 예술제는 서울 대학로 등지에서 29일까지 열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