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세대'의 예술가 오스틴 리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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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뮤지엄 개인전 '오스틴 리: 패싱 타임'파란 바닥에 사람이 큰대자로 누워 있다. 입에서는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쪼르륵’ 나온다. 이 작품의 이름은 ‘분수’(사진). 그 앞엔 긴 벤치가 놓여 있다. 마치 공원에서 분수를 보며 명상하듯 물 뿜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
'컴퓨터 덕후'인 83년생
아이패드·3D 프린터로
조각·회화·애니메이션까지
"예술가는 복서와 닮았다"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미국 뉴욕 출신 예술가 오스틴 리(40)의 ‘패싱 타임’ 전시 일부다. 스스로 ‘컴퓨터 덕후’라고 말하는 오스틴 리의 작품은 기계와 인간이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다. 그는 밑그림을 그릴 땐 펜 대신 아이패드나 VR(가상현실) 기기를 집어 든다. 모션 캡처 수트를 입고 몸을 움직여 작품의 모양을 만들거나 아이패드로 선을 그린 뒤 캔버스에 아크릴 회화로 완성한다. 조각 작품은 대부분 3차원(3D) 프린터로 제작한다.
기술이 만든 예술, SNS가 띄우다
오스틴 리의 작업은 소셜미디어에서 먼저 유명해졌다. 애플 컴퓨터 ‘맥’의 대기 화면인 무지개를 형상화해 만든 작품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밝고 화사하다. 온라인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자 전시 요청이 쇄도했다. MZ세대 컬렉터에게 사랑받는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도 그의 매력에 반해 자신의 갤러리 ‘카이 카이 키키’에서 개인전을 열어줬다. 미국의 유명 큐레이터 제프리 다이치의 갤러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그의 작품은 창작 방식도, 크기도 다채롭다. 조각 작품은 마디마디를 인쇄해 덩어리처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거푸집만 프린터로 만든 뒤 그 안에 청동 등의 재료를 채워 넣는다. 사람이 전시장을 걸어 나가는 듯 생생하게 표현한 조각 ‘워크’나 커다란 무지개 앞 팔을 벌린 작품 ‘미스터 오스틴’ 등은 대형 조각임에도 모두 3D 프린터로만 작업했다. 전시장에 놓인 벤치와 의자들도 모두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제작했다.
“예술가는 권투 선수와 닮았다”
오스틴 리는 ‘MZ 작가’로 불리지만 그 내면에는 고뇌와 철학이 깊이 깔려 있다. 거장들의 작품을 오마주한 다수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 ‘정반사’ 시리즈 중 하나로 나온 그림은 마르크 샤갈이 에세이집에 그린 그림을 본떠 그만의 방식으로 다시 그렸다. 그는 “코로나 속 인간의 우울, 고립감을 표현했다”고 했다.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을 오마주한 ‘워리어’도 같은 맥락이다.그는 예술가를 권투 선수에 비유한다. 미술을 배우기 전 체육관에서 일하며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 활동한 시간이 영향을 줬다. ‘갈등과 도전’이라는 전시관 안에 놓인 인물들이 모두 복서를 상징한다. 어떤 복서는 두 손을 든 채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복서는 링 위에 걸쳐진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작품만 보면 이 선수가 과연 이겼는지, 또 졌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복서로 활동한 시간은 그의 인생에 강렬한 경험이 됐다.오스틴 리는 “권투와 예술은 닮은 부분이 많다”며 “어떤 일이든 성취를 위해선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데 작품마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전시장은 시종일관 밝고 명랑하다. 곳곳이 그야말로 ‘인스타그래머블’하다. 앙리 마티스의 ‘춤’을 차용해 형광빛 핑크색의 사람들이 둥글게 손잡고 춤추는 작품이 대표적이다.마지막 전시장에선 세 면의 벽이 몰입형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진다. ‘플라워힐’이라는 제목으로 눈, 코, 입과 손발이 달린 붉은 튤립이 애교 부리듯 볼을 감싼 채 씰룩거리며 춤을 추는 작품. 해가 뜨고 밤이 찾아오는 시간대별 감상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이 인스타그램에서 2023년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짧은 영상에서 확장됐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