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둘러앉아 함께 TV를 볼 때의 위안… 미드 <프렌즈>가 떠올려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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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정민의 세상을 뒤집는 예술읽기 x 미국드라마혼술, 혼밥, 그리고 혼영. 나 혼자 살아도 얼마든지 재미나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결혼에 ‘적령기’가 따로 있어서, 그 때를 놓쳐 혼자 살게 되면 죽어서도 몽달이라는 이름의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괴담은 이미 전설의 고향이 되었지요. 한때는 이런 귀신을 구제하기 위해 영혼결혼식이라는 것도 존재했었는데 말입니다.
생각을 해보면 ‘몽달귀신’이나 ‘처녀귀신’ 같은 괴담의 유포자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자식이나 가까운 지인이 혼술, 혼밥이 일상인 독신의 외로움에 쩔어 살다가 결국 독거노인이 되지 말라는 걱정과 우려 섞인 경고였을 테지요. 사실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것보다 어쩌면 독신의 고립과 외로움을 더 걱정한 것일지 모릅니다. 나 혼자 사는 것도 나름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예전에 미처 몰랐던 탓도 있었겠고요.추석연휴가 지나면서 어떤 사람들은 끈끈한 가족애를 확인한 반면, 어떤 사람들은 가족 때문에 자주 상처를 받기도 했을 겁니다. 보통 명절연휴가 지나면 끔찍한 가족범죄가 뉴스에 반드시 등장할 만큼 가족은 참 어려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가족은 왜 가까워야만 할까?
오래도록 방송된 드라마 중 우리나라에 가족드라마 <전원일기>가 있다면, 미국에는 가족 같은 친구들의 시트콤 <프렌즈>가 있습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제작 방송되었고 아직도 OTT 플랫폼을 통해 방송되고 있죠. 여섯 친구들의 삶과 우정의 이야기가 20년에 걸쳐 이어지며 주인공들은 물론 그 방송의 시청자들도 마치 이들을 가족처럼 느끼게 될 정도였죠. 마치 연극무대와 같은 이 드라마세트는 주인공들의 셰어하우스였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에피소드가 탄생하였습니다. 최근 특별판에 BTS가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을 정도이고 드라마 속 패션은 최근 유행 중인 Y2K스타일이라 종영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드라마 <프렌즈>는 젊음과 우정, 그리고 젊은이들의 공존의 상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아무리 싸우고 화가 나도 이들은 무엇을 해도 늘 함께 합니다. 누구라도 혼자 있게 놔두지를 않지요.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연애상담을 하고, 밥을 먹고, 극장에 가고, 한 편이 되어 싸우기도 하고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피를 나눈 가족보다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관계는 끈끈하기 그지없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에피소드가 그 방증이고요.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를 모델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드라마들도 많았어요. 한류스타 송승헌과 조인성까지 출연했던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등이 있었고, 비교적 최근에 시즌2까지 만들어진 <청춘 시대> 또한 드라마 <프렌즈>와 같이 셰어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젊음, 우정 그리고 가족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청춘 연대가 핵심 주제였습니다.
문화트렌드를 통해 살펴보면, 혈연 가족 중심의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비혈연 가족으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독신 문화가 대세인 듯 보입니다. 나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살고 외로움은 SNS, 즉 사회연결망 속에서 해소하죠. 어쩌면 외로울 틈이 전혀 없습니다. 업로드와 좋아요, 댓글의 무한반복에 빠지다 보면 시간도 금방 흐르고, 그래서인지 대면만남과 대화보다는 문자나 DM이 훨씬 편한 소통수단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대면의 편리함이 주는 대가가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우울함의 증가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새로운 질병 목록에 외로움이 그 중 하나로 올라갈 판이지요. 펜데믹 기간에 확인하였듯이, 비대면의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대면의 그리움이 커지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요즘 어떻게든 ‘소속감’을 갖기 위해 애쓰기도 합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공동체적(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과 우리가 사는 시절이 너무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태어나자마자 자립할 수 없고 일정기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존재죠.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이런 걸 ‘상호의존성’이라고 합니다.
경쟁에 지친 세대는 혼자 있는 시간에 오히려 평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평안에 유효기간이 있음을 모르기도 하고, 또 더불어 함께하는 삶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경쟁은 끊임없이 타인을 적으로 만들며 각자도생을 부추겨왔으니까요.
내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까닭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 한번 가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왔던 사람들도 코로나 펜데믹 기간에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우리 일상을 지켜주던 수많은 의료진들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아주는 것,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야말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사람들의 의무겠죠. 그것이 또한 누구와도 더불어 살 수 있는 환경의 시작일 겁니다. 사진=HBO
드라마 <프렌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씬은 소파에 주인공 친구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입니다. 에피소드는 늘 이런 장면에서 시작하죠. 매번 약속을 만들고 이벤트를 기획하지 않아도, 그저 소파에 앉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됩니다. <응답하라 1988>의 파마머리 아주머니 셋이 평상에 앉아 고구마를 나눠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한때는 평범했던 삶의 모습처럼요.
지금 우리 시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기후위기는 물론이고, 생산인구 감소와 고령화 사회라는 위기, 언제 또다시 반격할지 모를 바이러스, 인공지능이 초래할 알 수 없는 사회변화 또한 인간에겐 위기이지요. 이런 위기 상황이 하나의 ‘사건’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각자도생으로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