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수수께끼를 향유할 수 있는 키워드 <파리 ‘로라 라미엘’展>

[arte] 신미래의 파리통신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 방 하나를 똑 잘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공간들, 수많은 천으로 덧대어진 하얀 벽’ 지난 파리 팔레드도쿄의 지하 전시장은 설치작가 로라 라미엘 (Laura Lamiel)의 작품들로 가득했다.
Laura Lamiel, Du miel sur un couteau, 2022-2023, Verre, miroir, chaise en métal, tube fluorescent, objets divers/ Courtesy de l’artiste &amp; Marcelle Alix, Paris @photo by Mirae Shin
오브제를 조립하고 배치함으로써 구성된 작품들은, 현대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념 미술’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개념 미술은 고전적 회화 작품과 달리, 작가의 고유한 그림체가 필히 표현되는 것도 아닌 데다가, 특정 주제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한눈에 읽기 힘들다. 접근성이 쉽지 않은 탓에, 현대 미술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가에 대한 조사는 물론이거니와, 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처럼 느껴진다.물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는 감상의 깊이에 영향을 주겠지만, 그 순서가 꼭 관람의 선행이 될 필요는 없다. 작품 속 숨겨진 힌트를 알아채고 작가의 아이디어를 공감해 나가는 시간은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 즐거울 수 있다.

로라 라미엘의 전시 ‘들리나요? (Vous les entendez?)’를 돌아보며, 현대 미술의 수수께끼를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많은 것을 내포하는 단서이다개념은 사물과 그 과정의 본질을 파악하는 사고 형식이다. 이때 사고는 언어가 있기에 개념으로 구축되고, 개념은 다시 언어로서 구체화된다. 그래서 개념 미술에서는 언어는 중요한 형식이 되며, 작품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Laura Lamiel, De la page 3 à la page rouge, 2023, livres peints, plexiglas miroir, objets divers/ Courtesy de l’artiste &amp; Marcelle Alix, Paris @photo by Mirae Shin
전시장 한가운데 마치 벽돌 더미로 보이는 붉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작품 ‘3페이지에서부터 붉은 페이지까지 (De la page 3 à la page rouge)’는 거울로 된 선반, 붉은색의 책, 글자가 새겨진 유리판, 조금의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어릴 적 문학 선생님이었던 어머니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의 등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빨간색의 책을 모으고 색을 칠하는 것에만 두 달을 할애했다. 상당한 규모의 책 무더기를 빙 돌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일부 책의 텍스트들이 빨간색의 물감으로 칠해져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개념 미술에서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텍스트가 가려져 있다니? 가려진 텍스트 위에는, ‘내가 책을 쓴 방법 (Comment j’ai écrit certains de mes livres)’이라는 문장이 보일 듯 말듯 하게 새겨진 유리판이 놓여있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 문장은 레이몽 루셀 (Raymond Roussel )의 책 제목으로, 책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인으로부터 습득한 오브제이다. 작가는 개인의 창작의 과정에서, 작품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외부 요소들을 최대한 차단하기를 바랐고, 결국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내 방식대로, 내 언어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더 이상 읽을 수 없도록 텍스트의 모든 언급을 의도적으로 지움으로써, 언어의 의미와 효과는 무력화된다. 그리고 최소한의 방법으로 희미하게 쓰인 책의 제목은, 거울 바닥에 비친 흔적으로서 존재한다. 어쩌면 창작을 탈취하는 모든 외부 조건에서 멀어지는 것, 즉, ‘내가 책을 쓴 방법’의 내용들을 지우는 행위는 작가에게 ‘내가 창작을 하는 방법’ 일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에는 벽돌, 육면체와 같은 책 개체의 기호만이 남겨졌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재료의 물성은, 작가의 관념을 담고 있다수많은 천조각으로 가려진 육중한 무게의 대형 책장이 보인다. 7m 길이의 금속 조형물인 ‘접힌 부분에서 (In the Folds)’는 작가가 체계적으로 접고 글귀를 삽입한 300kg의 흰색 천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상적인 크기의 이 작품은, 마치 장애물처럼 전시장 한 면을 차지하고 있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편, 옆에 놓인 의자, 주철로 만든 잘린 발, 흰색 시트는 부재한 신체의 존재를 연상시킨다.
Laura Lamiel, Dans les plis, 2023, ancrer, pieds en fonte, tissu, tube fluorescents/ Courtesy de l’artiste &amp; Marcelle Alix, Paris @photo by Mirae Shin
작가는 오랫동안 여성들의 노동이자 전유물이었던 가정의 체계를, 연약한 천의 물성을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작품을 관통하는 요소인 텅 빈 의자는, 어떠한 사람을 위한 것인지, 이미 떠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 자체로의 존재하는 것 인지 알 수 없다. 의자는 몸의 존재이고, 의자 그 자체이며 몸의 부재 또한 될 수 있다. 천 조각에 반복적으로 적힌,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취소해야 한다 (rien n’est à faire, tout est à défaire)’는 문구는 가정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무기력함을 증폭시킨다.

"여성은 늘 속박을 받아왔고, 천 (빨래)은 이러한 제약의 일부를 형성했습니다. 이 천들의 집합은 '할 일도 없고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하는' 상태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 조건은 반드시 취소되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로라 라미엘은 덧붙인다.
한편, 작가의 전체적인 작품에서 흰색 형광등은 쉽게 발견된다. 빛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것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작가에게 빛은 마치 붓과 같아서, 빛의 미세한 진동은 작품을 매우 조밀하게 만들어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In the Folds’를 군데군데 밝히는 하얀 불빛은, 작가의 정치적 관념이 담긴 심리적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전시의 전체적인 구성에는 시퀀스가 있다

전시장을 처음 들어서 서문을 읽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를 깨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는 전시 입구를 지나 첫 번째 작품 ’나이프 위에 꿀 (Du miel sur un couteau)’에 다다랐을 때 더욱 커진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이 작품에는, 바닥에 놓인 수천 개의 깨진 유리 조각들과, 그 앞 금속 재질의 물건들로 구성된 키트, 비스듬하게 놓인 의자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깨어진 유리조각의 날카로운 단면들과, 칼, 튜브 형태의 알 수 없는 금속 오브제들은 이내 긴장감을 유발한다.
Laura Lamiel, exposition Vous les entendez ?, Palais de Tokyo (16.06 – 10.09.2023). Crédit photo : Aurélien Mole
로라 라미엘은 지하철역 근처 도랑에서 두 개의 작은 금속 카트리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오브제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작업실에 쌓아 뒀으나, 그 속에 담긴 이산화 질소가 젊은이들의 자살을 위해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브제는 매우 아름다움과 동시에 매우 위험한 모순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형광등을 비추어, 마치 반짝이는 바다 같은 유리 조각의 행렬들은, 이러한 모순을 담고 있는 듯하다. 작품의 뒷면에 놓인 거울은 이 잠재적으로 위험한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발이 베일 듯한 유리 중앙에 놓인 위태로운 의자는 접근 불가능의 정서를 더욱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순환하며 관람하게 되는 전시 구조는, 관람자를 다시 첫 번째 작품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들리나요?’라는 전시 제목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로라 라미엘은 오브제와 원재료, 색과 빛을 긴장감 있게 조립하고 신중하게 배치함으로써 실존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들, 그리고 개인적이며 일상적인 것들을 강력하게 결합시킨다. 전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내면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귀 기울이도록 인도한다.천천히 시간을 두고, 작품의 의미에 하나하나 호기심을 가질 때, 예술은 줄곧 즐거운 놀이가 된다. 작가가 발견한 우연이, 작은 관심이 되고 그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선택적 들림이 되기를 바라본다.

사진/ 신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