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 집중탐구]어수룩함과 냉혹함 두루 갖춘 '한국의 드 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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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하늘의 롱테이크송강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배우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한껏 장난기를 머금은 듯하면서도 진중한, 천의 얼굴을 가진 송강호는 한국영화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겼다.
송강호가 대배우인 이유는?
'거미집'으로 돌아온 송강호
시대의 애환부터 블랙코미디까지
마치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마틴 스콜세지 감독)부터 '좋은 친구들'(1990·마틴 스콜세지)의 어수룩함과 냉혈한 모습을 연상케 하듯, 송강호는 넓은 스펙트럼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 영화계는 송강호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다. 1990년 연극 '최선생'으로 데뷔 33년 차를 맞은 송강호는 코미디, 시대극, 멜로, SF, 액션, 범죄극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만의 인장을 남겼다. 1997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깡패 판수 역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야비하고 비열한 깡패 판수의 모습에 관객들은 "어디서 진짜로 깡패를 섭외해 찍은 줄 알았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강제규, 김지운, 봉준호, 박찬욱, 이준익,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거장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며 유일무이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영화 '거미집'(2023)은 '조용한 가족'(1997),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밀정'(2016)으로 무려 5번째 호흡을 맞춘 김지운 감독과 재회한 작품이다. '거미집'은 1970년대 영화제작을 배경으로 김 감독(송강호)이 자신의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다시 찍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졸작 아닌 걸작을 만들고픈 욕망에 사로잡힌 김 감독은 확신이 들지 않는지 중얼거리고 죽은 신 감독(정우성)의 환영을 보는 광기 어린 캐릭터다.송강호는 이틀간 결말을 찍어야 하고, 신성필림 제작사의 독촉과 검열로 인해 혼돈에 휩싸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디렉팅을 따르지 않고 촬영장을 이탈하는 배우 한유림(정수정)을 잘 구슬리거나, 유일하게 자신을 지지하는 신성필름의 재정담당 신미도(전여빈)의 열정에 버거워하고, 찌질한데 귀여운 요구를 하는 배우 강호세(오정세)와 은근한 케미를 발산하기도 한다.'거미집' 속 송강호는 딜레마를 겪는 김 감독이 불안감에 자학하는 모습부터 슛이 들어가면 자신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낸다. 송강호의 힘은 여기에 있다. 스크린 안에서 이질감 없이 캐릭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송강호는 평범한 소시민부터 시대의 애환을 담은 얼굴까지 경계를 마구 뛰어넘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잊혀지지 않는 시대의 애환 담은 얼굴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살인의 추억'(2003) ,'사도'(2015)쉬이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생경한 얼굴로 울분을 토해내는 것 같기도, 후회로 지난날을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한 '살인의 추억'(2003·봉준호 감독)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를 응시하는 송강호의 미디엄 클로즈업 샷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도 잊히지 않은 이미지가 됐다.1986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 역을 맡은 송강호는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박해일)를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준다. 끝내 연쇄살인범을 잡지 못했던 박 형사는 시간이 지나 그 일대를 다시 방문한다. 자신처럼 어떤 남자가 방문했었다는 어린 여자아이의 말에, 박 형사는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다. 기운 빠지게 "그냥 뭐, 뻔한 얼굴인데. 그냥 평범해요"라고 말하는 여자아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이 송강호의 생경한 얼굴이다.송강호는 시대의 설움과 비통함을 담은 얼굴로 잊지 말아야 할 기록을 다시 복원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1999·감독 강제규)에서 남북의 이념 갈등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의 비밀을 목도했을 때의 복잡미묘한 표정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감독 박찬욱)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사이에서 판타지 같은 남북의 우정이 무너진 순간, '사도'(2015·감독 이준익)에서 천륜지간을 끊어낸 비정함까지.빛바랜 풍경들에 색깔을 덧입히는 송강호의 얼굴들은 그래서 생생하다.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 오경필 중사 역의 송강호는 장난기 넘치는 말투로 지뢰를 밟은 남한군 이수혁 병장(이병헌)을 놀리는 천진난만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경계를 넘어 우정을 나누게 되지만, 이내 오경필의 상사에게 발각되면서 피로 물든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웃음기 가득했던 오경필의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얼룩진다.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의해 수사받는 상황에도 입을 다물고 그날의 진실을 덮는 오경필의 오묘한 표정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대가 짓밟은 관계 안에서 송강호는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을 선보인다. '사도'의 피도 눈물도 없는 영조(송강호)가 아들 사도세자(유아인)를 내치는 장면에서 아버지와 국왕의 역할이 혼합된 복잡한 표정은 가히 놀랍다.
'사람 냄새' 나는 소시민적인 캐릭터
'반칙왕'(2000), '괴물'(2006), '브로커'(2022)우리가 송강호에게 매료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 냄새'나는 일상의 캐릭터들을 찰떡같이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반칙왕'(2000·감독 김지운)의 어눌하면서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와 '괴물'(2006·감독 봉준호)에서 세상 모르게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 아버지(변희봉)의 한강매점을 돕는 강두의 백수 같은 한심한 모습, '브로커'(2022·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빚에 시달리는 탓에 돈에 목숨 거는 상현까지. 이들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는 까닭은 짠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챙겨주고픈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특히 '괴물'에서 진한 녹색의 상의와 무릎나온 회색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두는 한심해 보이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 중학생 딸 현서(고아성)만큼은 애지중지 홀로 키우는 아버지다. 갑자기 한강 변에 나타난 괴물 탓에 강두는 딸 현서의 손을 꼭 잡고 달리지만, 정신없이 달리다가 딸을 잃어버리고 만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 강두의 아버지 박희봉(변희봉), 박남일(박해일), 박남주(배두나)는 힘을 모아 현서를 찾는다. 강두는 딸을 찾기 위해 괴물과 사투를 벌이며 각성한다. 추레한 몰골의 강두는 이전까지의 한량 같은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학부모 참관마저 늦잠 자느라 참석하지 못하던 강두가 아버지의 죽음과 딸의 실종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눈물겹다. 괴물이 한강 변에 튀어나온 의문의 재난 상황 속에서 소시민으로서 송강호의 얼굴은 '우리들'의 삶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서글프다.소심하고 평범하던 은행원, 임대호가 '반칙왕' 울트라 타이거마스크 사진을 보고 레슬링을 시작하는 영화 '반칙왕'은 통쾌하고 유쾌하다. 만원인 지하철에 몸을 싣고 가는 임대호가 자신의 경기장 안에서 감정을 마음껏 분출한 채로 움직이는 모습은 카타르시스마저 안겨준다.
누구나 한 번쯤 반복되고 정해진 일상에서 일탈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가면을 쓴 임대호는 무기를 장착한 것처럼 당당하고 거침없다. 지쳐서 축 늘어진 어깨가 아니라 링 위에서 활보하는 임대호는 일종의 선구자나 다름없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송강호가 그려낸 소시민들의 일상과 풍경들은 애처로울 때도 있지만, 짠해서 더 눈길이 간다.
특유의 몸짓으로 빚어낸 블랙코미디
'박쥐'(2009), '설국열차'(2013), '기생충'(2019)봉준호 감독의 작품 세계 안에서 송강호는 계급의 가장 하위층에 자리한다. 우스겟소리로 김지운 감독 영화에서는 장르적 코미디를 입고,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는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로,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는 창백한 얼굴의 소년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말이 있다.'조용한 가족'(1997), '반칙왕'으로 초기에 송강호는 코미디 이미지가 강했다. 하회탈처럼 서글서글한 외모에 툭툭 말하는 사투리 섞인 말까지.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송강호는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도 블랙 코미디적인 부분을 찾아볼 수 있는데,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송강호)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피를 먹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피를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서늘한 얼굴의 상현은 이전까지 송강호가 보여주던 어딘가 우스운 모습과는 상반된다. 냉철하게 상황을 직시하면서 태주를 향한 본능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아이러니함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다.그런가 하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송강호는 그야말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애써 삶을 살아가야 하는 최하위층이다. '설국열차'에서는 꼬리 칸에 탑승하고, '기생충'에서는 백수 가장 기택(송강호)으로 체면도 차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기생충'에서 동익(이선균)의 운전기사로 일하는 기택은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요?"라는 말에도 킁킁대며 자신의 냄새를 맡아야 한다. 반지하와 마당이 있는 상류층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인 냄새로 웃기지만 도저히 웃을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머쓱하게 웃어넘기면서 너스레를 떠는 기택은 울분을 참아내야 하는 소시민이다. 벅찬 상황을 이겨내면서 긍정적으로 상황을 무마하는 기택의 일그러진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인상에 박힌다. 송강호의 블랙코미디는 단순히 상황이 아닌 사람을 보여주기에 슬픈지도 모른다.대체 불가능한 배우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를 압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뭉뚱그려서 송강호를 탐구했지만,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배우 송강호는 아직도 새로운 몸짓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와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 늘 신선함을 보여주는 송강호는 아직도 자신의 인장을 하나씩 남기는 중이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