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존재감'...사랑스럽진 않지만 보석같은 배우 염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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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얼굴이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은 건 여배우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하늘은 한꺼번에 두 개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 S라인 몸매의 여배우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종종 사람들은 이렇게 애기 한다. "거, 대체 연기가 늘지를 않네."
하늘은 그런 여배우의 경우 얼굴을 일부러 긋거나 머리를 뽑거나 하면 그제서야 연기력을 주는 식이다. 좀 치사하긴 하다. 샤를리즈 테론이 앞이마 머리를 뽑고 나왔을 때 (‘몬스터’)나 역시 이마에 숯검댕이를 잔뜩 칠하고 나왔을 때(‘매드 맥스’) 하늘은 그녀에게 바야흐로 연기라는 선물을 부여한 바 있다. 얼굴이 부담되는 여자, 배우가 될 수 없다. 만고의 진리다.염혜란을 두고 사랑스런 배우라는 소리를 한다는 건 위선이다. 그녀에겐 다른 수식어가 필요한 바 아마도 그것은 천부적, 신들린, 연기파 등등의 형용사가 맞을 것이다. 요즘 그녀를 두고 대세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작품 편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더 글로리 1,2’ 이후 OTT 드라마를 거의 싹쓸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스크 걸’에서 염혜란은 오로지 ‘지 새끼’ 밖에 모르면서도 교회는 열심히 다니고 동시에 피의 복수를 계획하는 이 세상 모든 엄마의 ‘기형적 마스크’의 내면을 연기한다. 염혜란 만큼 그 위악성을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여배우는 그리 흔치가 않다. 잘못된 모성의 제1 원칙은 자신의 악한 심성조차 오로지 자식을 위한 길이어서 결국 선한 것이라는,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엔 받아 주실 것이라는 착각에서 나온다. ‘마스크 걸’이 보여준 것은 착시의 여성성, 왜곡된 모성이 만들어 내는 한국사회의 이상성(異常性)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한다는 따위의 주제의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드라마이다. 그렇게 보면 비로소 극의 주체가 나나-고현정으로 이어지는 캐릭터가 아니라 염혜란의 역할로 옮겨 오게 된다. 염혜란은 자칫 사소해질 수 있는 드라마의 테마를 거대담론으로 바꿔내는 역할을 한다. 드라마 연출이나 영화감독들에게 염혜란이란 존재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다.염혜란은 이정은(‘기생충’ ‘내가 죽던 날’), 김선영(‘세자매’ ‘드림 팰리스’) 등과 함께 대세 3인방 여배우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계와 드라마 분야는 메말랐을 것이다. 윤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은과 김선영이 다소 극악스러운 아낙네 연기에 일가견을 보인다면 염혜란은 주로 가슴 떨리는 편모의 역할(대체로 남자는 백수 남편이거나 폭력 남편이다)일 때가 많다. 실질적인 가장 일을 해 나가는 메마르지만 강단 있는 여성상이다.
평단에서는 주목했지만 흥행에서는 그리 점수가 좋지는 않았던 영화 ‘야구 소녀’에서 염혜란은 야구를 하는 주인공 여학생 수인(이주영)의 엄마로 나온다. 엄마는 수인에게 야구를 그만하라고 종용하는 척, 사실은 정말 자신의 딸이 야구를 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의 믿음을 갖는다. 믿음은 희망적일 때보다 절망적일 때가 많다. 돕고 밀어 주자니 경제 형편이 따르지 않고 자식의 교육 수준을 높이자니 나의 ‘가방끈’이 짧다. 사람들의 개인사는 대체로 이처럼 불일치의 역사일 때가 많다.
‘야구소녀’에서 관중석 구석에 몰래 앉아 볼을 던지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은 가엾기가 그지 없다. 세상의 올바른 에미는 자신이 가여운 것보다 자식이 가여워서 우는 심성을 지닌 여인이다. 염혜란은 자신이 울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울린다. 그걸 할 줄 아는 배우이다. 흔치가 않다.염혜란에게 있어 그 같은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바로 드라마 ‘더 글로리’ 시리즈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위해, 그 딸의 유학을 위해, 그럼으로써 지옥같은 폭력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딸 만큼은 해방시키기 위해, 기꺼이 제5열, 프락치가 되려고 한다. 현남이란 이름 역의 염혜란은 문동은(송혜교)과 박연진(임지연)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시도한다. 그 줄타기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의 운명이 걸렸으며 한편으로 정의의 실현도 걸려 있다. 드라마 ‘글로리’가 보여 준 두마리의 토끼 몰이는 사실 염혜란의 역할에서 구현된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 글로리’에서 가장 눈물나는 장면은 또 다시 두들겨 맞아 얼굴 여기저기가 부어터진 염혜란이 딸을 차에 태우고 가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다.
“너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는 이제 유학갈 수 있어.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엄마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리고 자꾸 되뇌인다. 이제 됐어. 이제 됐어. 그러나 딸은 안다. 거기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그걸 고스란히 엄마가 뒤집어 쓸 수도 있음을. 딸은 불안해서 흐느끼고 엄마는 더욱 더 냉철하고 단호 해진다. 딸은 그런 엄마를 겪으며 성장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엄마의 희생으로 자라난다.
‘더 글로리’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염혜란이 극중 나쁜X, 박연진의 뺨을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후려 갈길 때이고 그걸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이 훔쳐 보고 있는 장면에서다. 이제야 현남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바로 세웠다는 자부심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느끼게 해준다. 승리감이 느껴진다. 맞다. 그래야 한다. 인간 삶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살면서 딱 한번이라고 저렇게 자존감을 되찾아야 한다. 상대의 뺨을 후려칠 수 있어야 한다.염혜란은 연극과 독립영화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발휘했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 유명하다는 연우무대 소속으로 시작해 2000년부터 근 20년을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스크린으로 옮긴 것은 봉준호가 연극 ‘이, 爾’를 본 것이 계기가 됐고 ‘살인의 추억’의 단역이 시작이 됐다. 2003년 때이다. 영화에서는 큰 영화 작은 영화에 대한 차별이 없는 여배우로 유명하다. 영화 ‘특송’과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2’ 같은 상업적 줄기의 작품 사이사이에 ‘빛과 철’같은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작품이나, ‘아이’나 ‘내일의 기억’같은 작은 예산의 영화에도 출연한다.염혜란이 안 나오면 요즘의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염혜란은 늘, 없는 듯, 알고 보면 가공할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카리스마가 극 내면에 물 흐르듯 흐르게 한다. 예쁜 배우보다 좋은 배우, 실력 있는 배우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배우들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내 얘기와 우리들의 얘기를 해 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와 우리를 대변해 줄 수가 있는 배우가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 배우들이 그리 많지 않은 시대이다. 염혜란을 두고 보석 같은 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