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규제 모범생 콤플렉스'가 기업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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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감축·노동협약·중대재해법‘무슨 일이든 잘해야 한다’는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과속으로 밀어붙인 정책은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사례가 ‘탄소중립’이다. 전(前) 정부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영국까지 가서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줄이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산업계의 폭넓은 의견 수렴도 없이 기존 감축 목표보다 14%포인트나 올렸다. 이에 따라 탄소 저감 부담을 직접 떠안은 기업은 탄소배출권을 사는 데 막대한 비용을 써야 하고, 철강·석유화학 등 탄소 배출이 많은 4대 업종의 근로자 18만 명이 고용 불안을 우려하게 됐다.
속도전 벌였던 규제 정상화해야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협약 비준도 마찬가지다. 대립적·전투적 노사관계가 뿌리 깊은 우리 현실에서 지난 정부는 노동계의 요구만 일방적으로 수용해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고 핵심 협약 3건을 비준했다. 특히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점거 금지 등 사용자의 대항권은 쏙 빼고 해고자와 실업자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서 우리 노사관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뒤집힌 운동장’이 돼버렸다.중대재해처벌법 제정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 법이 모델로 삼은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은 법인에 벌금형만 부과할 수 있지만, 중대재해법은 경영자 개인에게 징역형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안전사고의 모든 책임을 경영책임자와 원청업체에 묻기 때문에 기업인의 부담이 매우 크다. 더 큰 문제는 대표가 구속이라도 되면 회사가 폐업할 수 있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성급하게 도입한 중대재해법이 노사 모두에 부담이 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정작 모범생이 돼야 할 영역에서는 낙제생이다. 과거에 세팅된 금산분리 등 낡은 규제가 경제·사회 저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신사업 리스크는 원천 봉쇄하는 수준으로 법·제도를 만들다 보니 한국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일례로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가운데 55개사는 국내에서 사업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고 한다(2022년 기준). 특히 해외에서 성행하는 승차공유, 원격의료, 공유숙박은 국내에서 온전한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환경, 노동, 안전, 경영 등 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쳐 세계 최고 수준의 규제를 갖고 있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신중하게 검토하는 규제를 우리가 먼저 도입하는 일도 잇따랐다. 가히 규제에 대한 모범생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하다.한국과 달리 미국 등 주요국은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를 나날이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총동원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경쟁국을 견제한다. EU도 주력 산업 보호를 위해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미·중 패권 경쟁 심화, 자국 우선주의 강화 등 총성 없는 경제전쟁에서 우리만 어쭙잖은 규제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하루라도 빨리 이념에 치우친 반시장적 규제를 정상화하고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해야 어려운 경제와 민생을 살릴 수 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국제 수준보다 엄격한 국내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완화하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을 2년 유예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