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해서 혐오스럽다" 비난에도…앞다퉈 모셔간 이 남자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수정
'행복을 채운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
그가 남긴 넉넉한 행복
폭탄이 설치된 장소는 세계적인 예술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가 만든 청동 조각 작품 ‘새’ 바로 앞. 반군 조직은 테러 직후 이런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보테로는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의 아버지다. 그러니 앞으로도 보테로의 작품을 계속 폭파할 것이다.” 보테로의 아들이 이끄는 콜롬비아 국방부와 반군 조직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화풀이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작품은 물론 보테로 자신의 신변도 위험해진 상황이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똑같은 조각을 새로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평화의 새’라는 이름을 붙인 뒤 부서진 조각 옆에 세워 놓았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협과 불행에 예술로 맞선, 보테로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행복을 가득 채운 화가’로 불리는 보테로가 지난달 1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은 보테로에 헌정하는, 조금 늦은 부고 기사입니다.
넉넉한 게 좋아!
보테로가 10살이 되던 해, 외삼촌 손을 잡고 간 투우장에서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피가 튀는 잔혹한 경기였지만 보테로에게는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투우사가 되고 싶어요!” 어머니와 외삼촌을 조른 끝에 보테로는 투우사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당시 콜롬비아 남자아이들이 이런 학원에 등록하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의외로 막상 배워보니 투우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대신 보테로는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습니다. ‘황소랑 싸우는 것보다 황소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좋아.’
그러던 어느 날, 보테로는 투우 경기 입장권을 파는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가게 주인은 보테로의 그림 실력에 놀랐습니다. “네 작품이 마음에 드는구나. 가게에 전시해 볼래?” 그리고 불과 며칠 만에 그림 하나가 팔렸습니다. 보테로가 그림으로 벌어들인 첫 수입이었습니다. 동생에게 자랑하러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동안에 돈을 흘려서 잃어버리기는 했지만요. 그날 보테로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의 반응. “넌 앞으로 밥을 쫄쫄 굶을 거다.” 하지만 이런 말도 보테로의 열정을 멈출 순 없었습니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콜롬비아 미술계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보테로의 작품을 “유럽물이 너무 많이 들었다”며 외면했습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이 시기 보테로는 자동차 타이어를 팔고 잡지에 그림을 그려 주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너무 뚱뚱하잖아!”
“무솔리니(이탈리아의 독재자이자 2차대전 전범)와 시골의 바보 여인 사이에서 생긴 임신 9주짜리 태아들 같다.”보테로가 미국에서 연 전시에 세계적인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보낸 반응은 이랬습니다. 다른 평론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법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빵빵한 얼굴, 거대한 몸과 이를 힘겹게 감싸고 있는 옷, 군데군데 접혀 부풀어 오른 살…. “재미 삼아 돌려볼 만한 낙서나 관광지 캐리커처는 되겠지만, 이걸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평론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테로의 뉴욕 생활 초기는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습니다.
이런 인기에 보테로를 비판했던 평론가들은 입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평론가들조차도, 보테로의 그림을 볼 때 굳게 다문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재미있잖아요.
아픔도 그림에 담아
보테로가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닙니다. 이 시기 보테로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가장 크나큰 비극은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네 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도로 옆에 있던 벽이 보테로 가족이 타고 있던 차를 덮친 끔찍한 사고였습니다. 목숨을 건진 보테로도 어깨와 손, 손가락을 크게 다쳤습니다.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손을 수술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보테로는 붕대를 감은 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난감 말을 타고 파란색 경찰 제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보테로는 아들을 잃은 아픔을 담은 이 작품을 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훗날 보테로는 이 그림을 비롯한 16점의 작품을 메데인에 있는 안티오키아 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작품들이 있는 방의 이름을 보테로의 죽은 아들 이름인 ‘페드리토 보테로’로 붙였습니다.
1995년에는 첫 부분에서 언급한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위협 때문에 그는 이후 해외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위협은 계속 이어져서, 콜롬비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문을 열 때도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불과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이 아들은 마피아에게 정치 자금을 받은 일이 적발돼 나중에 감옥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의 막바지,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렵게 하는 파킨슨병과 싸우면서도 보테로의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화를 그릴 힘이 없어지자 그 대신 수채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뼛속까지 예술가였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요. 생전의 보테로는 “즐겁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제 작품들과 이때까지 모은 거장들의 명화를 콜롬비아에 기부한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 중 하나였습니다. 관객들은 작품들을 보며 즐거워하겠죠. 사람들의 즐거움과 행복이 저에게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이번 기사는 ‘페르난도 보테로’(마리아나 한슈타인 지음, 한성경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 펴냄), 다큐멘터리 영화 ‘보테로’(2018), 페이퍼 ‘The Art of Fernando Botero’(후안 카를로스 보테로), 뉴욕타임스와 가디언의 부고 기사,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아트뉴스의 2013년 인터뷰 기사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