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가야지, 창업한다고요?"…韓 청소년에 베팅 후 생긴 일 [방준식의 N잡 시대]

김향란 쎄이지코리아 대표
90년대 브로드웨이서 잘나가던 기획자
"돈 못 벌어도 4년째 청소년 창업 지원
세상 놀라게 할 창업가 나올수 있잖아요"
"저는 1990년대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해외 뮤지컬 판권을 확보하는 일을 했어요. 브로드웨이에서는 헬렌 킴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그러다 외환위기가 터졌고 사업단이 해체되면서 나왔죠. 한국 최초로 '오페라의 유령' 제작판권을 확보해 들여오기도 했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 50대가 되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다 4년 전부터 청소년 창업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대학입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창업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관심이 없더군요. 하지만 단 한명이라도 창업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이 있다면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성공을 경험한 인재가 훗날 글로벌 기업가가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웃음)"
비영리단체 쎄이지코리아에서 개최한 국제청소년 창업대회 한국 대표 선발전에 출전한 창업팀 모습.
'엄마, 나 창업할게'라는 말을 들은 학부모들은 대부분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대학 입시의 지상 최대 목표는 의대 진학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교육부의 '2020~2022학년도 의대 정시 합격자 현황'에 따르면, 3년간 의대 정시 합격자 중 재수 이상을 한 'N수생' 비율은 78.7%에 달했다. 높은 보수와 사회적 평판, 정년 걱정 없는 안정된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장수생을 자처하며 의사를 꿈꾸는 수험생이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 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의사의 평균 임금은 2억3070만원이다.그런데도 청소년 창업 지원에 4년째 재능기부를 하는 이가 있다. 단순히 창업 아이디어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창업해 회사를 세우고 마케팅과 영업까지를 경험한 이들에게 상을 주는 청소년창업대회를 운영한다. 올해에는 글로벌 청소년 창업대회인 ‘쎄이지 월드컵'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공연기획자 김향란(59) 씨의 이야기다.
비영리단체 쎄이지코리아 대표 김향란 공연기획자(59 사진 왼쪽)가 국제 청소년 창업대회 한국대표 선발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Q.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공연기획자 김향란 쎄이지코리아 대표(59)입니다. 과거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선스 계약을 주로 했었고, 지금은 재즈 콘서트 및 페스티벌 기획을 많이 하고 있어요. 뮤지컬 프로듀서로도 여전히 활동 중이죠. 2019년부터는 국제 청소년 창업조직인 쎄이지 글로벌의 한국 대표를 맡아 청소년 창업을 장려하는 활동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Q. 90년대 브로드웨이를 휩쓸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일을 했어요. 저는 영어를 조금 하는 편이어서 해외 공연을 맡게 됐어요.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메이저 프로듀서들과 일을 했습니다. 환율도 낮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도 컸던 시기라 수입 공연이 주를 이뤘죠.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사업단이 해체되면서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이후에 저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2000~2001년 ‘오페라의 유령’의 한국어 라이선스 계약을 따내 들어오면서였어요. (웃음)"Q. 뮤지컬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상반기 공연 티켓 판매액만 5024억원에 달한다고 하더군요. 그중 절반이 뮤지컬 덕분입니다. 특히 블록버스터 뮤지컬 때문이죠. 마니아들도 늘면서 전체 시장이 커졌습니다. 덩달아 티켓 가격도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일부 인기 작품들은 웬만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 티켓 가격이 비싸죠.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인 것 같아요. 작품 확보 경쟁이 치열한 만큼 치러야 할 로열티도 비싸지는 거니까요. 뮤지컬 시장도 점점 양극화가 됐죠.”

Q. 화려하던 시절 이후, 인생의 고비가 있었는데요.
"두통과 등뼈 통증, 만성피로를 40년간 달고 살았어요. 체력이 안 되니 프로젝트를 치고 나갈 자신이 없어 그냥 포기해버리는 상황이 여럿 있었어요. 투자받는 데에 대한 두려움도 컸고요. 현재 메이저 프로듀서로 자리 잡은 이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고, 엄청난 파국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분들인 거죠. 지금 생각을 해보면, 성공의 중요 요소 중의 하나는 건강과 체력인 것 같아요. (웃음)"

Q. 왜 갑자기 청소년 창업 관련 일을 하시게 됐나요.
"젊어서 먹고살기 바쁠 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어요. 50대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죠. 늘 작게나마 뭔가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죠.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받았던 도움을 어떤 형태로든 갚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늙고 쇠락하는 것보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에 내 시간을 쓰고 싶었어요."Q. 재능기부는 어떤 형식이죠.
"쎄이지 글로벌은 전 세계의 10대 청소년들을 글로벌 기업가로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단체입니다. 현재 45개국이 참가하고 있는데 매년 각국의 청소년들이 실물 창업에 도전하면서 대회를 치르고 있습니다. 한국도 매년 대표를 출전시키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이 창업에 관심을 가지고 글로벌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는 거죠. 여러 창업 전문가들이 재능기부로 멘토링도 제공하고, 창업 교육을 원하는 중고등학교가 있으면 파견해 교육도 하고 있어요."

Q. 학교에서 창업이나 기업가 정신은 배운 적이 없습니다.
"맞아요. 모든 교육이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학부모들도 자신의 아이를 소위 SKY나 의대에 보내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죠. 생각해보세요. 똑똑한 아이가 갑자기 '엄마 나 창업할래'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말리는 게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유명 글로벌 기업의 CEO들을 보세요. 대부분이 다 대학 무용론자들이예요. (웃음)"

Q. 그런데 왜 4년 넘게 지속하고 있나요.
"단 한 명이라도 창업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 ‘1%의 천재가 99%의 보통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모 기업 회장의 말을 믿어요. 우리에게는 그 한 명의 천재가 필요한 거죠. 혹시 모르죠. 대회를 통해 세상을 바꿀 인재가 나올지 모르잖아요. 본 대회에 참가하는 동기가 뭐가 됐건 창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영리단체 쎄이지코리아에서 개최한 국제청소년 창업대회 한국 대표 선발전에 출전한 창업팀이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Q. 한국 청소년 대표팀들이 세계 대회에서 성과가 좋았습니다.
"매년 '청소년 창업 올림픽' 같은 글로벌 행사가 열려요. 올해는 '변호사 AI 챗봇'과 '못난이 농산물'을 이용해 창업을 한 두 팀이 한국 대표로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죠. 국내에는 똑똑한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창업한다면 충분히 글로벌 기업가로 성장할 인재들인 거죠."

Q. 국내 정부 지원사업이나, 창업 대회와 차이점이 있나요.
"단순 아이디어 창업대회가 아닙니다. 실제로 회사를 설립해야 하고, 눈으로 보이는 제품이나 서비스, 그리고 구체적인 영업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탈락입니다. 개인사업자나 법인을 만든 청소년 팀만 도전이 가능하죠. 펀드레이징에서부터 회사설립 및 운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청소년들이 거창한 아이템을 찾기보다는요. '자기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불편이나 문제를 해결해보자 마음에서 창업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합니다."

Q. 창업 시스템이 굉장히 구체적이군요.
"제품이든 서비스든 실물로 만져지는 것이 있어야 해요. 단순히 공책이나 머릿속 아이디어로는 안 돼요.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동호회나 부모님께라도 제품을 팔아야 해요. 창업 규모나 매출액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이디어 기획, 마케팅, 펀딩, 제품화, 판매 및 정산까지 창업의 처음과 끝을 모두 경험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작은 성공의 경험이 훗날 큰 사업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요."

Q. 심사 기준이 매우 까다롭군요.
"모든 심사는 국제대회 심사기준을 그대로 따릅니다. 결과는 수치로 매겨져 합산되며 최고점을 받는 팀이 우승합니다. 물론 대학 진학용 스펙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스펙 한 줄을 '창업'에서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되더라고요."Q. 예술 문화 쪽 사업도 지속해서 하시고 있습니다.
"저의 본업은 쇼 비즈니스입니다. 돈을 벌어야죠. (웃음) 아무리 좋은 예술작품도 돈으로 구매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올해도 남편의 크리스마스 특별공연이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가 22주년으로 단일 컨셉으로는 국내 최장기 공연기록을 수립 중이죠. 성악을 전공 중인 딸의 매니지먼트도 할 계획입니다. 창작 뮤지컬도 다시 도전할 생각이죠."

Q.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4050들처럼 열정적으로 도전할 나이는 지났어요. 이제는 사회에 기여를 할 수 있고 공생할 수 있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러면서 수익도 나오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야 지속할 수 있으니까요. (웃음) 물론 어머니 영어 연극처럼 수익을 내기보다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있어요. 너무나도 극렬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다소라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많이 벌여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조금씩만 줄이고,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공연은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매개체겠죠."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여러 직업을 가지는 'N잡'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습니다. N잡 뿐만 아니라 NEW잡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방준식의 N잡 시대>는 매주 일요일 연재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면 기사를 놓치지 않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방준식 기자 silv000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