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몹시 부는 날, 빨간 망토를 입고 낯선 마을에 도착한 모녀

[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 영화 <초콜렛>의 모녀, 마을에 당도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빨간 망토를 두른 모녀가 마을에 도착한다. 어머니는 분주하게 공간을 쓸고 다듬고 하더니 초콜릿 가게를 열었다. 모녀가 마을에 도착한 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 곳을 기웃거렸지만 막상 초콜릿을 파는 상점임을 확인하고는 돌아 선다.

영화 1)<초콜렛 chocolat>의 이야기다. 결국 그 딱딱하고 냉랭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초콜릿 상점에서 풍기는 향기와 아늑함 그리고 그녀의 쾌활하고 따스한 마음에 이끌려 하나 둘씩 그녀의 공간을 찾아들기 시작하고 마을은 달콤하고 기분 좋은 초콜릿 향으로 물든다.이 영화의 도입부가 참 좋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빨간 망토를 입고 낯선 마을에 도착한 모녀라니! 젊고 아름다운, 의욕이 넘치는 어머니와 귀엽고 다정한 딸이라니!

이후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좋았지만 오래 전 본 영화인데도 영화의 매력적인 도입부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어디에서 왔을까? 왜 이 마을에 왔을까? 왜 하필 그렇게 바람이 부는 날 마을에 왔을까?어찌 보면 인트로의 그 모습은 영화와 큰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인트로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이면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전사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제이디차의 ‘구미호’, 21세기에 도착하다

(제이디차, 발견, Discovery 2023 oil on canvas 45*35cm) / 이미지 제공 : 스페이스K
마곡 스페이스K에서 제이디차의 전시가 있었다.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소녀가 여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걸까, 소녀가 여우에게서 태어나는 중인 걸까, 소녀와 여우는 하나인데 인간계로 들어오기 위해 변태를 하는 걸까 ...
이 그림 한 장은 우리에게 생각을 요구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있지만) 정답은 없으리라. 제이디차의 작품들은 설화를 기반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펼쳐내 감상하기를 원하니까 말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초콜렛>의 모녀가 떠오른 건, 작품 속 존재들이 무언가에 대항해 몸을 움츠리고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겁을 먹거나 대들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좀 더 단단하게 좀 더 강인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들)은 이 곳에 왜 왔을까? 어떤 전언을 가지고 왔을까?
(제이디차, 모계 A Meeting of Mothers, 2023 oil on canvas 360*200cm(Dyptich)) / 이미지 제공 : 스페이스K
그 자신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어머니에게서 한국의 이야기들을 듣고 자란 제이디차는 구미호와 마고할미, 삼신할미 등 한국의 설화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들은 묘한 이세계로 우리를 데려가는데 이것은 단순히 설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창조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작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구미호를 매력적인 어떤 존재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 할머니-어머니-자신으로 이어지는 모계 서사를 불어 넣으면서 시간 속에서의 여성성을 드러냈고종(種)들 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서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존재들로 강렬한 정체성을 스스로와 관객에게 부여한다.

#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융 학파의 심리학자인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여성의 집단 무의식에 ‘늑대의 원형’이 녹아 있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늑대는 야성성이 강한 포식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여성성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조용한 이미지를 내포한다. 그런데 이 두 이미지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2)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반문하겠지만 늑대의 이미지에서 떠오르는 야성성, 야성적 자아가 난폭함이 아니라 원초적 생명력을 가지는 것으로 풀이한 학자의 의견에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위 책의 저자인 클라리스 에스테스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동화나 신화,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원시 상태의 자연이 남긴 것을 따라갈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말한다. 3)

심리학자인 에스테스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근원적인 힘, 여성성을 찾아내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변형되었는지, 회복과 부활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예술가인 제이디차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숱한 한국의 설화 속에서 여성이 갖는 힘, 여성성을 이해하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생명력을 가졌는지 어떤 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이디차, 집 Home, oil on canvas 55*70cm) / 이미지 제공 : 스페이스K
제이디차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역시 ‘혼종’이 아닐까. 작가가 구현하는 혼종은 단순한 혼종이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간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순한 종의 외적 혼합이 아니라 기존의 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선입견을 뒤집고 바꾸어 놓는 혼합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여우-구미호와 까마귀는 한국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종이며 존재이지만 하이브리드로 새롭게 태어난 그들 존재는 여성과 함께 여성 서사와 함께 여성 계보와 함께 든든한 힘을 가지며 긍정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이야기는 힘이 있다. 이야기 속의 비유는 어쩌면 비유 이상으로 큰 것을 포함하고 있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발견해 내야 하는 비밀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 이야기들이 작가들에게 흘러들어갈 때 그 이야기는 보다 공고한 힘을 갖게 되며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해석을 요구하며 그 이야기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제이디차의 ‘구미호’는 그래서 편견을 깨고 이미지를 뒤집고 새로움을 들려주는, 익숙한 변주이며 신선한 퍼즐이다.
* 참고도서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1) ‘초콜릿’이 맞는 표기법이지만 영화 제목의 경우 개봉 당시 표기대로 ‘초콜렛’으로 씀.
2)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추천의 글. 김승희 (서강대 국문과 교수)
3)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서문. 클라리스 에스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