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270원 올랐을 뿐인데…일본인들 '벌벌' 떠는 까닭 [글로벌 리포트]

일본인 가계부 대해부

마요네즈 1강 큐피, 가격 30엔 올렸다 점유율 추락
만성 디플레 일본서 '가격인상=소비자 이탈' 각오해야
일본인들은 매월 얼마 벌어 얼마 쓰나
일본인들의 노후자금과 노후계획은
미원의 원조인 아지노모토는 일본 식품업계의 절대 강자다. 사명이면서 모태사업인 조미료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한 '아지노모토'의 일본 시장 점유율은 94%다. 시가총액은 2조8000억엔(약 25조원)으로 일본 최대 맥주회사인 아사히홀딩스(2조7769억엔)를 앞선다. 한국증시 시총 13위 카카오(약 23조원)보다 큰 회사다.

일본인의 식탁을 지배하는 아지노모토가 유일하게 맥을 못추는 시장이 마요네즈다. 마요네즈 시장에서 만큼은 1919년 창업한 도쿄 기업 큐피에 밀려 만년 2위다. 큐피 마요네즈의 시장 점유율이 60~70%를 유지하는 반면 아지노모토의 점유율은 10% 중반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30엔 올렸다 점유율 8%P 날렸다

'큐피와 난장이들'의 구도였던 마요네즈 시장에 이변이 벌어진 건 지난 4월이었다. 작년 6월까지만 해도 72.3%였던 큐피의 점유율이 64.2%로 10%포인트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아지노모토의 점유율은 15.4%에서 17.2%로 상승했다.

지각 변동을 주도한 건 자체브랜드(PB) 상품이었다. 2022년 6월 8.4%였던 점유율이 지난 4월 14.2%까지 뛰어오르면서 큐피가 잃어버린 점유율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요네즈 시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지난해 국제 원자재값 급등으로 일본의 기업물가는 40년 만의 최고치로 치솟았다. 불어나는 원가를 감당하려면 가격을 올려야 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섣불리 늘어난 비용을 소비자 가격에 전가할 수 없었다.

만성 디플레 상태인 일본에서 가격을 성급하게 올렸다가는 소비자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마요네즈 시장에서 '총대'를 맨 회사가 큐피였다.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는 만큼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가 일부 이탈하더라도 충격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두 차례에 걸쳐 주력상품인 450g 용량의 마요네즈 가격을 190엔대에서 227엔으로 올렸다. 예상과 달리 가격을 고작 30엔 올렸을 뿐인데도 소비자들은 무섭게 떨어져 나갔다. 원인은 '2'라는 숫자였다. 지난 30년 동안 일본 소비자들에게 마요네즈는 백엔대 상품으로 각인돼 있었다. 200엔대 마요네즈란 일본인의 머릿 속에 없는 것이었다. 아지노모토의 마요네즈는 용량이 400g으로 큐피보다 50g 작지만 가격이 190엔이다. g당 가격차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슈퍼 진열대에 선 소비자들은 '2'로 시작하는 큐피 대신 '1'로 시작하는 아지노모토의 마요네즈를 집었다. 가격이 더 저렴한 PB 상품 점유율이 뛰어오른 것도 같은 이유다.

단 돈 30엔에 시장 점유율이 10%포인트씩 휘청인 마요네즈 시장은 일본 소비자가 가격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소비자는 가격에 민감하다. 일본 소비자들은 '뭘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가격에 특히 민감하다. 왜일까. 30년째 오르지 않은 소득, 오랜 디플레이션, 살벌한 수준인 일본 슈퍼마켓의 경쟁 구도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43만엔 벌어 38만엔 쓰는 일본인

이 가운데 보통의 일본인들이 한 달에 얼마를 벌어 얼마를 쓰는지 살펴보면 일본 소비자들이 유별나게 가격에 민감한 이유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민들의 가계부를 분석해 소비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살피는 것은 일본 시장을 눈여겨 보는 한국 기업과 투자자 입장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프리랜서 파이낸셜플래너 아사다 리카가 작성한 가계결산표를 살펴보자. 부부와 자녀 두 명으로 구성된 일본인 가구의 평균적인 벌이와 씀씀이를 나타냈다. 남편은 풀타임 정규직이고 아내는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일본인 가정의 보편적인 근로 형태다.

수입은 세금과 사회보험료 등을 모두 뺀 실수령액을 기준으로 했다. 지출은 식비와 공과금 같은 기본 생활비와 주거비, 교육비, 기타 지출 등 4개 항목으로 구성된다. 기타 지출이란 질병 등 예상치 못하게 돈이 들어가는 항목을 말한다.

아사다 리카의 가계결산표는 일본 정부의 가계조사에 나타나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수입 및 지출 현황과 거의 일치한다. 이 표를 보면 평균적인 일본 4인 가구는 매달 43만엔을 벌어 38만엔을 쓴다. 이 가운데 6만엔이 식비다.

수입에서 지출을 뺀 여윳돈, 즉 저축할 수 있는 돈은 5만엔이다. 보너스 같은 일회성 수입(175만엔)에서 갱신료 등 임대 계약을 유지하는데 드는 초기 비용(주거비)과 학원비(교육비), 기타 지출 등 일회성 지출(135만엔)을 뺀 금액은 1년에 40만엔이다.

매월 5만엔씩 1년간 모은 60만엔과 합치면 100만엔. 보통의 일본인 가정은 1년에 100만엔 정도를 저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연간 지출 591만엔 가운데 식비는 72만엔으로 12%를 차지한다.

매년 100만엔을 저축하는 이 가정의 미래는 걱정거리가 없는걸까. 여기서 일본인은 노후자금이 얼마나 필요한 지에 대한 문제가 등장한다.


일본인의 노후자금은 얼마

공익재단 생명보험문화센터가 작년 10월 발표한 '생활보장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은퇴한 부부가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한 노후자금은 월 23만2000엔, 여유있게 생활하려면 월 37만9000엔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후 평균 수명까지, 즉 죽을 때(20년간)까지 최소한의 생활을 하려면 5568만엔, 여유있게 생활하려면 9096만엔이 필요하다. 현재 65세와 60세 이상인 일본인 부부는 매월 평균 19만1000엔의 연금을 받는다. 20년 동안 받는 총액은 4584만엔이다.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서는 연금 이외에 984만엔,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려면 4512만엔이 더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매월 100만엔씩 저축한다면 노후에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건 가능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일본인의 이러한 불안을 확신으로 바꿔놓은 게 '2000만엔 문제'다. 2019년 금융청은 2017년 일본 정부의 가계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연금이 주수입원인 65세와 60세 이상인 부부의 월 수입과 지출을 분석했다.

그 결과 월 수입은 20만9198엔인데 지출은 26만3718엔으로 매월 5만4520엔씩 적자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청은 평균 수명이 95세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노후기간을 30년으로 잡았는데 그러자면 1980만엔이 부족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면 은퇴 후에는 연금 만으로도 노후를 즐길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인들에게 노후자금이 부족하다는 분석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의 노후자금 설계가 이토록 정교할 수 있는 이유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월급이 안 오르지만 물가도 오르지 않으니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는 전제 하에 노후를 설계할 수 있었다.


뼈대부터 흔들리는 노후 설계

하지만 지난해부터 20년 넘게 미동도 않던 물가가 치솟으면서 일본인들의 노후설계는 뼈대부터 흔들리고 있다. 애써 모은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노후에 필요한 돈은 더 늘어나게 됐다.

일본 정부의 기대대로 매년 물가가 2%씩 오른다고 가정하자. 10년 후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생활비는 월 28만3000엔, 여유롭게 사는데 필요한 생활비는 월 46만2000엔으로 오른다. 지금보다 각각 5만1000엔과 8만3000엔이 늘어난다.

20년간 필요한 금액은 6792만엔과 1억1088만엔으로 지금보다 1224만엔과 1992만엔이 증가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연금 수령액이 줄면 줄지 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게 일본의 현실이다. 매년 100만엔씩 저축해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가가 오르면서 매년 100만엔씩 저축할 수 있을 지도 자신할 수 없다.

앞서 살펴봤던 평균적인 일본 4인 가정의 가계결산을 다시 검토해 보자. 최근의 물가상승률 3.6%(식비 5.9%, 공과금 15.2% 상승)와 소득 증가율 2.2%를 적용했다. 그 결과 저금할 수 있는 여윳돈이 91만6000엔으로 줄었다. 연간 지출이 612만8000엔으로 3.6% 늘어난 반면 수입은 704만4000엔으로 2.2% 증가하는데 그친 탓이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 현금의 가치는 떨어진다. 현재 1000만엔인 현금의 가치는 10년 후 820만엔, 20년 후 672만엔으로 줄어든다. 가계결산표에서 본 것처럼 노후 생활자금에서는 특히 식비와 전기·수도료 등 공과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둘 다 물가 상승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항목들이다.

지진과 쓰나미, 호우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큰 병에 걸리는 등 예정에 없던 지출이 생기기라도 하면 20~30년 후의 생활은 지옥이 될 수도 있다. 2019년 외국계 생보사 PGF생명이 60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분의 2는 저축액이 2000만엔을 밑돌았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고 보면 일본인들이 슈퍼마켓에서 10엔 차이에 민감해 하는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일본에서 마요네즈 가격을 30엔 올린 것만으로 순식간에 점유율이 10% 추락하는 이유다. 일본인들이 짠돌이어서라기보다 미래를 대비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행위인 것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