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이기면 남는장사…배상금 뜯어내며 침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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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4
(10) 주기적으로 전쟁 일으킨 일본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서구식 내각 제도를 수립하고 초대 총리로 취임하는 1885년까지 일본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근대화에 매진했다. 성실하게 두 번의 내전(보신 전쟁·세이난 전쟁)을 치렀고, 성실하게 구미(歐美)를 베끼며 내치를 다졌다.
청일전쟁으로 돈맛 본 뒤, 판 키워 전쟁광 되다
큰돈 위해 더 큰 전쟁 '제국주의 광풍'
러·일 전쟁, 1·2차 세계대전까지 중독
식민지배는 일종의 '일자리 창출사업'
자국민을 제국 경영에 동참시켜 완성
이제 그만 성실해도 되련만 이들에게 뒤늦게 ‘중2병’이 찾아오면서 일본은 갑자기 성실한 불량 학생이 된다. 정한론(征韓論)으로 시작된 힘 자랑과 욕심 채우기를 전쟁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펼친 것이다. 외우기 편하게 이들은 10년 단위로 큰 전쟁을 치렀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세계대전이다. 전쟁 목록은 이게 다가 아니다.큰 전쟁 사이마다 작은 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간에 타이완 정복전쟁과 의화단 전쟁을 치렀고,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제국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병 투쟁을 진압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주도 성장은 계속된다. 세계대전이 휴전 상태로 접어든 1918년에는 시베리아로 출병해 1922년까지 주둔했고(남들은 다 철수),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대망의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전쟁으로 흥했다가 전쟁으로 망한 ‘전흥전망’의 나라가 19세기 말, 20세기 중반의 일본이다.
전쟁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은 아편전쟁에서 배웠다. 자기들이 먼저 침략해놓고 상대가 반항하면 이를 진압한 뒤 배상금을 받아내는 수법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챙긴 배상금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면서 받은 환부금 포함 3억6000만 엔이다.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3~5년 치인데(재정 규모가 7000만 엔에서 1억 엔까지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세상에 이렇게 남는 장사가 없다. 물론 원가 계산은 해야 한다. 청일전쟁에 들어간 전비(戰費)는 한 달에 2000만 엔꼴로 9개월간 1억8000만 엔이 들어갔으니, 투자금액 대비 200% 수익률을 달성했다. 이 돈을 일본은 어디에 썼을까. 이 질문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이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정신(?)인 도박꾼은 더 큰 돈을 따기 위해 도박 자금으로 쓴다. 전쟁으로 번 돈의 절반인 1억8000만 엔을 일본은 육군과 해군 확장 비용에 투입한다(성격상 투자?). 나머지는 제강소(製鋼所)를 짓고 철도 부설, 전화 가설 등에 썼다. 넓게 보면 다 전쟁 관련 비용이다.
다음 타깃은 러시아였다. 일단 예산 편성부터. 일본 정부가 마련한 돈은 5억 엔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청나라와는 체급이 다르다. 일본은 나머지 전비를 외채로 충당했다. 총 12억 엔이었고, 이래저래 가외로 들어간 비용까지 다 합치면 대략 20억 엔이 러일전쟁에 투입된 총비용이다.성과는 최악이었다. 해전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육전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러시아는 일관되게 퇴각하는 전술을 펼쳤는데, 이렇게 되면 러시아군은 집에 가까워지고 일본은 멀어진다. 병참선이 길어지는 것은 패배의 전조 중 하나 아니던가. 사허강(江) 전투에서 탄약이 떨어진 일본군은 유유히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손 놓고 바라봐야 했다. 결정적으로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다. 러시아는 지급을 거부했고 일본은 배상금 요구를 관철할 수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 러일전쟁은 20억 엔의 자재(資財)를 날리고 20만 명의 영령을 만들어낸 상처뿐인 무승부였다(만주를 챙기고 한국 지배를 확정한 것이 그나마 소득?).
당초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뜯어내려던 배상금은 30억 엔이었다. 계산법은 단순했다. 청일전쟁보다 10배의 희생이 났으니 그 10배를 받아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틀어지고, 일본은 졸지에 12억 엔 채무 국가로 전락한다. 이 손해를 만회시켜준 게 세계대전이다. 1915년부터 일본에는 대전경기(大戰景氣)가 찾아왔고, 산업화 과정까지 마무리되면서 이 운 좋은 나라는 1920년 27억 엔의 채권국이 된다. 자, 돈이 생겼다. 이 돈으로 뭘 할까. 배운 게 도둑질이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라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1921년 워싱턴 군축 조약에 참여한 해군 대신 가토 도모사부로는 재미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러시아와 독일이 망가진 현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전쟁에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에 돈을 빌려 줄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미일전쟁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으니, 제국주의 광풍이 무섭다. 군부와 천황만 미쳐 돌아갔을까. 아니다. 제국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이 제국 경영의 이익에 동참하면서 완성된다. 타이완과 한국을 집어삼키면서 일본에는 수천 명 규모의 보직이 생겨났다. 식민 지배는 일종의 일자리 창출 사업이었고 러일전쟁 후 배상금도, 일자리도 없자 실망한 일본 민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도 그 맥락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