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산업 올해 실적 '반토막'…팬데믹 수혜 초호황기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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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연평균 20% 성장해 온 명품 산업,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명품 업계가 누렸던 초호황기가 종식되는 분위기다. 전통적인 ‘큰 손’이었던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유럽까지 전 세계에서 명품 업체들의 판매 실적이 뒷걸음질하고 있어서다. 물가 상승률이 임금 상승률을 앞지르면서 명품 수요가 급속도로 위축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올해는 최악의 경우 5% 성장에 그칠 것" 전망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의 소매‧명품 부문 담당 부사장인 조엘 드 몽골리에는 12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올해 글로벌 명품 업계의 실적 성장세는 최악의 경우 5%에서 멈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주 낙관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더라도 8~10% 성장에 그칠 거란 전망이다. 과거 연평균 실적 증가율(6%)과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그러나 2020년 이래 3년간 20%를 웃돌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악화했다.몽골리에 부사장은 “작년과 비교하면 (성장률 전망을) 절반 정도로 줄일 수밖에 없다”며 “그간의 놀라운 성장은 장기적 관점에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관측은 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세계 1위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3분기 실적에서도 감지된다. LVMH의 3분기 매출 증가율은 9%(전년 동기 대비)로, 전 분기(17%) 대비 큰 폭으로 둔화했다. 루이비통, 크리스찬디올 등 핵심 브랜드들이 줄줄이 시장 전망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다. 한 루이비통 매장 직원은 FT에 “올해 시작은 좋았지만, (판매) 속도가 확실히 느려졌다”며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장 자크 기오니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는 “3년 동안의 눈부신 호황기가 끝났고, 실적은 역사적 평균치로 다시 수렴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이 지점에서 계속해서 머물지는 정말로 알 수 없다. 우리가 더 추락할 것인지, 아니면 한때 누렸던 20% 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덧붙였다.최대 시장인 미국에선 연초부터 명품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올해 2분기 증가율이 0%로 정체했고, 3분기에는 2% 소폭 늘어났다. 최근 들어서는 유럽에서 수요가 크게 위축됐다. 같은 기간 판매 증가율이 19%에서 7%로 급락했다. 명품 기업 10곳이 포함된 스톡스 유럽 럭셔리지수는 지난 4월 정점을 찍은 뒤 20% 가까이 빠졌다. 대장주인 LVMH 주가는 실적 발표 다음날 7%가량 하락했고 동종 기업들의 주가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인플레이션으로 가계의 소비 여력이 크게 약화한 것이 주효했다. 이탈리아 최대 은행인 유니크레디트에 따르면 유럽 지역 내 물가 상승으로 가계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팬데믹 봉쇄 기간 축적된 저축액이 완전히 동난 상태다. 지난 2분기 유럽연합(EU) 지역 소비 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2% 감소했고, 올해 남은 기간 반등할 가능성도 작다.영국 컨설팅 업체 옥스퍼드이코노믹스의 로리 페네시 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 내 소비 지출은 계속해서 인플레이션 압력을 받을 것”이라며 “가계 실질 수입은 유럽 부채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의 수준을 겨우 웃돌고 있다”고 짚었다. 유럽 금융사인 오도 BHF의 장 당주 애널리스트는 “거시 경제적 요인과 더불어 사람들은 이제 명품 소비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며 “소비 둔화가 한 번 시작되면 어디서 끝날지는 결코 알 수 없다”고 했다.이 같은 소비 패턴 변화를 감지한 백화점들은 전략 수정에 나섰다. 최고급 하이엔드 라인보다는 비교적 저렴해 접근성이 좋은 상품 판매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미 지역 유명 백화점의 한 바이어는 “‘디자이너 비즈니스’는 이제 끝났다. 로고에 의존한 세일즈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며 “작년보다 50~60% 할인된 가격에 제품을 판매하는 브랜드들이 있다”고 말했다.
바이어들은 띠어리(Theory), 베로니카비어드(Veronica Beard), 울라존슨(Ulla Johnson) 등의 브랜드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있다. LVMH 계열사 중에서도 비교적 가격대가 합리적인 로에베(Loewe)의 가방 판매 실적이 그나마 양호한 수준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톱 브랜드 중 지금과 같은 폭풍의 계절을 견뎌낼 수 있는 곳은 샤넬과 에르메스뿐”이라고 전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