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해서 혐오스럽다" 비난에도…앞다퉈 모셔간 이 남자

'행복을 채운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
그가 남긴 넉넉한 행복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1999).
1995년 6월 10일 콜롬비아 메데인의 산 안토니오 공원. 흥겨운 음악 축제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축제장은 피와 살점이 튀는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콜롬비아의 반군 조직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설치한 대량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한 겁니다. 이 테러로 어린아이 세 명을 포함해 3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고, 200명 이상이 다쳤습니다.

폭탄이 설치된 장소는 세계적인 예술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가 만든 청동 조각 작품 ‘새’ 바로 앞. 반군 조직은 테러 직후 이런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보테로는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의 아버지다. 그러니 앞으로도 보테로의 작품을 계속 폭파할 것이다.” 보테로의 아들이 이끄는 콜롬비아 국방부와 반군 조직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화풀이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작품은 물론 보테로 자신의 신변도 위험해진 상황이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똑같은 조각을 새로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평화의 새’라는 이름을 붙인 뒤 부서진 조각 옆에 세워 놓았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협과 불행에 예술로 맞선, 보테로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행복을 가득 채운 화가’로 불리는 보테로가 지난달 1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은 보테로에 헌정하는, 조금 늦은 부고 기사입니다.

넉넉한 게 좋아!

'벨라스케스처럼 차려입은 자화상'(1986).
남아메리카 대륙 서부에는 안데스산맥이 있습니다. 길이 7000km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산맥입니다. 보테로는 이 산맥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1932년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곳은 변변한 도로도 없는 시골이었습니다. 노새를 타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아버지는 보테로가 네 살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어머니 혼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집안 형편은 늘 쪼들렸습니다.

보테로가 10살이 되던 해, 외삼촌 손을 잡고 간 투우장에서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피가 튀는 잔혹한 경기였지만 보테로에게는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투우사가 되고 싶어요!” 어머니와 외삼촌을 조른 끝에 보테로는 투우사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당시 콜롬비아 남자아이들이 이런 학원에 등록하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의외로 막상 배워보니 투우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대신 보테로는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습니다. ‘황소랑 싸우는 것보다 황소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좋아.’

그러던 어느 날, 보테로는 투우 경기 입장권을 파는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가게 주인은 보테로의 그림 실력에 놀랐습니다. “네 작품이 마음에 드는구나. 가게에 전시해 볼래?” 그리고 불과 며칠 만에 그림 하나가 팔렸습니다. 보테로가 그림으로 벌어들인 첫 수입이었습니다. 동생에게 자랑하러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동안에 돈을 흘려서 잃어버리기는 했지만요. 그날 보테로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의 반응. “넌 앞으로 밥을 쫄쫄 굶을 거다.” 하지만 이런 말도 보테로의 열정을 멈출 순 없었습니다.
보테로의 초기작인 '우는 여자'(1949).
시골 마을에서는 거장들의 명화는 물론 일반적인 화가들의 유화조차 실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보테로는 자신의 재능으로 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10대 때부터 신문 삽화를 그려서 번 돈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스무살 되던 해 콜롬비아의 전국적인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겁니다. 상금을 받은 보테로는 곧바로 유럽으로 향해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접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5~1492)등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색감과 질감은 그의 예술 세계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콜롬비아 미술계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보테로의 작품을 “유럽물이 너무 많이 들었다”며 외면했습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이 시기 보테로는 자동차 타이어를 팔고 잡지에 그림을 그려 주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쉬지 않고 놓지 않고 끝까지 붙으면, 결국 깨달음의 순간은 오는 법입니다. 스물네 살의 어느 날, 보테로는 만돌린(악기의 일종)을 그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악기 가운데에 있는 구멍을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림 전체의 분위기가 마법처럼 확 바뀌었습니다. 만돌린은 둥글둥글해졌고, 그림에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한 부피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부피감에서는 건강과 풍요, 생의 기쁨 등 콜롬비아와 남미를 상징하는 정서도 느껴졌습니다.
'만돌린이 있는 정물'(1957).
사람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양이 넉넉해지자 그림은 편안해졌습니다. 보테로가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화가’라고 많이들 표현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뚱뚱한 게 아니라 사람과 사물의 관능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 풍만함과 넉넉함이 좋은 거죠. 현실은 상당히 메말랐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현대미술의 중심지, 미국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자기 작품을 더 넓은 세상에 알리고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너무 뚱뚱하잖아!”

'프랭크 로이드와 그의 가족'(1972).
“무솔리니(이탈리아의 독재자이자 2차대전 전범)와 시골의 바보 여인 사이에서 생긴 임신 9주짜리 태아들 같다.”

보테로가 미국에서 연 전시에 세계적인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보낸 반응은 이랬습니다. 다른 평론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법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빵빵한 얼굴, 거대한 몸과 이를 힘겹게 감싸고 있는 옷, 군데군데 접혀 부풀어 오른 살…. “재미 삼아 돌려볼 만한 낙서나 관광지 캐리커처는 되겠지만, 이걸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평론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테로의 뉴욕 생활 초기는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시간이 흐르자 뮌헨 국립현대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등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앞다퉈 모셔가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에는 기괴해 보였지만, 자꾸 보다 보니 보테로의 화풍에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보테로의 그림은 기존의 어떤 미술 경향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고 정치 사회적 의미도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창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스타일’이 확고했습니다. 눈·코·입이 제멋대로 붙어 있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을 보면 누구나 “피카소다”라고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요.
'열두 살의 모나리자'(1959). 특유의 화풍을 다듬고 있던 시기 그린 작품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이 작품을 구입해 소장 중이다.
이런 인기에 보테로를 비판했던 평론가들은 입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평론가들조차도, 보테로의 그림을 볼 때 굳게 다문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재미있잖아요.

무엇보다도 보테로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행복감을 줬습니다. “그림이라면 뭔가 심오한 뜻을 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비판에 보테로는 이렇게 답하곤 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요.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보면 약간 겁을 먹는 것도 그런 생각 때문입니다. (제 작품 속) 유머는 관객들이 작품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예술은 즐거움과 행복감을 줘야 한다고요!” 이런 철학 덕분에 보테로는 인기 작가가 됐고,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바 옆에서 춤추는 사람들'(2001).

아픔도 그림에 담아

보테로가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닙니다. 이 시기 보테로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가장 크나큰 비극은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네 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도로 옆에 있던 벽이 보테로 가족이 타고 있던 차를 덮친 끔찍한 사고였습니다. 목숨을 건진 보테로도 어깨와 손, 손가락을 크게 다쳤습니다.

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손을 수술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보테로는 붕대를 감은 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난감 말을 타고 파란색 경찰 제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보테로는 아들을 잃은 아픔을 담은 이 작품을 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훗날 보테로는 이 그림을 비롯한 16점의 작품을 메데인에 있는 안티오키아 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작품들이 있는 방의 이름을 보테로의 죽은 아들 이름인 ‘페드리토 보테로’로 붙였습니다.
'말을 탄 페드리토'(1974).
'춤추는 사람들'(1987).
이 밖에도 다른 아들 페르난도 때문에 위험한 일을 여러 번 겪기도 했습니다. 콜롬비아 상원의원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페르난도를 해코지하려는 테러 조직들이 보테로에게까지 손을 뻗친 겁니다. 1994년 테러 조직이 보테로를 납치하러 콜롬비아에 있는 집에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테로는 집에 없었지만, 테러 조직은 그의 반려견 두 마리를 죽이고 떠났습니다.

1995년에는 첫 부분에서 언급한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위협 때문에 그는 이후 해외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위협은 계속 이어져서, 콜롬비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문을 열 때도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불과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이 아들은 마피아에게 정치 자금을 받은 일이 적발돼 나중에 감옥에도 다녀왔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보테로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위협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미에 들어선 군사정부들에 대한 풍자 그림을 그렸고, 마약 카르텔에 대한 그림도 그렸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포로 고문 사건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등 다른 나라의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습니다. 보테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작품이 곧바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그림을 그리면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남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덕분에 스페인 내전에서의 참상을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요.”
'Car Bomb'(1999).

인생은 아름다워!

'앵무새와 여자'(1973).
지난달 15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테로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10시간씩 그림을 그렸습니다. 정말로 날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 년 내내 그림만 그립니다. 휴일이나 주말도 쉬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는 그림을 그립니다. 생일에도 그림을 그려요. 새해 첫날에도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보테로는 평생 약 5000점에 달하는 유화와 400점에 달하는 조각을 만들어냈습니다.

인생의 막바지,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렵게 하는 파킨슨병과 싸우면서도 보테로의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화를 그릴 힘이 없어지자 그 대신 수채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뼛속까지 예술가였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요. 생전의 보테로는 “즐겁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제 작품들과 이때까지 모은 거장들의 명화를 콜롬비아에 기부한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 중 하나였습니다. 관객들은 작품들을 보며 즐거워하겠죠. 사람들의 즐거움과 행복이 저에게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루이스 샬레의 죽음'(1984). 투우사의 죽음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는 평생 투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의 뜻은 이뤄졌습니다. 보테로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그림과 조각들은 세상에 남아 보는 이에게 편안한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작품만 보면 보테로가 테러 위협과 아들의 죽음, 비평가들의 혹평을 비롯해 여러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는 걸 도저히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증오와 슬픔 대신, 삶을 당신이 사랑하는 아름답고 유쾌한 것들로 채우세요.”*이번 기사는 ‘페르난도 보테로’(마리아나 한슈타인 지음, 한성경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 펴냄), 다큐멘터리 영화 ‘보테로’(2018), 페이퍼 ‘The Art of Fernando Botero’(후안 카를로스 보테로), 뉴욕타임스와 가디언의 부고 기사,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아트뉴스의 2013년 인터뷰 기사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