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조차 아름다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객석까지 지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이단비 작가의 [발레 리뷰]
모나코-몬테카를로발레단,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단 5일간의 사랑, 강렬한 역설의 美를 보여줬다"
건물 사이에 이어진 줄 위에 천 조각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이승택의 <바람>이란 설치미술 작품이다. 그 흔들리는 움직임 속에서는 우리는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는 유치환의 시 <깃발>을 떠올리게 된다. 형체 없는 자연 현상이 과연 조형화되고 미술이 될 수 있을까. 소리가 없는데 시끌벅적한 아우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질문 안에서 우리는 ‘역설’이란 단어를 읽는다. 일상의 감각 안에서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지점이 예술 안에서 경이로운 조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번에 내한한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안무작 <로미오와 줄리엣>도 온통 아름다운 역설이 가득한 무대였다.기술이냐 표현이냐, 예술가들의 고질적으로 갖고 있는 숙제를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완전한 합일을 통해 풀어낸다. 이 지점에서 역설의 미를 읽어내는 건, 마이요 스스로 “제 작품들은 안무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피력했지만 이런 말이 무색하게 기술적인 역량에서 어느 무용수도 제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작품의 주변인물로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감정과 캐릭터를 살려낸 점은 특별했다.
어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적극적인 유모의 모습을 만나게 되고, 로미오의 친구들을 통해서는 짓궂은 10대 소년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아들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마담 캐퓰릿에 깊이 공감하다가, 두 젊은 연인의 시신 앞에서 로렌스 신부가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이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고 앞으로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연민을 품게 된다. 기술을 추구하거나 보여주는데 방점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동시에 감정선 안에 완전하게 녹아있는 그 기술들에 혀를 내두르다가 역설의 매력 안에 휘말리는 것이다.

정점은 마지막 장면이다. 죽음의 그 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가장 큰 역설이다. 티볼트의 죽음의 순간은 어떤가. 긴박하고 숨 막히는 그 순간의 역동성을 슬로우비디오처럼 연출해서 무거운 침묵으로 이끌어낸다. 관객은 입을 틀어막고 타악기의 강한 타건 안에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맞추게 된다.이 장면뿐 아니라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영화적 기법을 적용했다. 각각의 장면을 로렌스 신부의 회상과 시각을 통해 이끌어 가는 점은 특히 그렇다. 몬테규가와 캐퓰릿가의 갈등과 다툼,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어긋한 신호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 장면은 로렌스 신부가 통탄과 울음 안에서 과거를 되짚어보는 상황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장면은 한 장의 그림처럼 멈춰 서는데, 그때 고전과 현대의 미를 조화시킨 제롬 카플랑의 의상은 그림 같은 미장센을 완성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조명 디자인은 이번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지점이다. 어떤 장식도 없는 백지 상태의 무대세트를 세운 건 간결한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접근이지만 그 위에 입혀지는 조명은 미술적 색채와 감각을 끌어내면서 역시나 역설의 코드를 읽게 만든다. 그래서 작품을 보는 내내 비울 때 채워지고, 놓을 때 잡게 된다는 지혜를 마주대하게 된다.

몬테카를로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이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강력한 끈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안무가들이 자신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면서도 음악만큼은 절대 바꾸지 않는 건 그 음악이 갖는 미적 매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발레음악에 애정이 깊었던 프로코피예프가 이 곡을 작곡하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겪었지만 그 수고로움이 무색하지 않을만큼 이 음악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았다. 이 음악에 로렌스 신부의 회상을 ‘움직이는 내레이션’으로 덧입힘으로써 몬테카롤로만의, 마이요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이번 무대는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연주가 함께 했다. 이 지점에서 언론사가 시대의 문화예술을 이끌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새로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몬테카를로발레단과 합을 맞추는 현장을 관객에게 선사한 것은 신선한 감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으로 몬테규와 캐퓰릿 두 가문이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과연 이 작품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주는 결말이다. 그동안 <로미오와 줄리엣>은 안무가마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마무리를 보여줬다.
존 크랭코는 두 사람이 포개져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죽음을 통해 사랑이 맺어지는 결말을, 케네스 맥밀런은 끝내 연인의 손을 잡지 못하는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비극의 절정을 보여줬다. 몬테카를로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젊은이의 죽음과 그것을 지켜보는 로렌스 신부의 통탄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바라보는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냈고, 관객도 이 감정의 주인으로 만들어냈다.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그 자체가 가장 큰 역설이다. 5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사랑은 완전무결의 사랑으로 보이지만 세월의 녹을 먹지 않는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죽음까지 불사한 건 단 5일이어서 가능한 사건이란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2막 6장에서 로렌스 신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게 사랑을 절제하라. 긴 사랑이 되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들의 단 5일 간의 사랑에 우리가 이토록 오랜 세월 열광하고 곱씹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잃어버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순수했던 감정과 열정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에서 읽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래저래 거부할 수 없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다. 마이요는 춤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이 감정과 기억을 상기시키고, 하나로 묶었다.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난 뒤 팬들이 출연진으로부터 사인을 받고 있다. 이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