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때문에 망한 '40대 사장님'…한국 3대 부자된 사연 [김익환의 컴퍼니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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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병철 창업회장 2화"1950년 7월 10일. 나의 자동차 미국제 '시보레'를 박헌영(남로당 당수)이 타고 있었다. 공산당의 온갖 약탈과 만행을 목격했다."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인민군에 회사·차 강탈
임시수도 부산서 재기…설탕으로 제조업 진출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이건희 회장이 되찾아
6·25전쟁이 터진 직후.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피난을 갈 시점을 놓친 후 서울에 발이 묶였다. 삼성물산으로 승승장구한 그의 자산은 북한군이 빼앗아 갔다. 심지어 그의 생애 첫 번째 '마이카' 쉐보레도 북한군 간부가 강탈해갔다. 전쟁 보름여 만에 빈털터리로 전락해버린 것. 1937년 중·일전쟁 여파로 사업을 접은 그가 두 번째 실패를 맛본 것이다. 두 번의 실패와 엄혹한 외부 환경을 마주하면 보통 사람은 사업 의지가 꺾일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을까. 6·25전쟁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은 애써 침착하고자 했다. 전쟁이 금세 끝날 것이라는 믿음에 서울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 만에 서울은 인민군이 장악했다. 인민군은 서울에 진입한 뒤 이 회장을 비롯한 '자산가'들의 재산을 모조리 강탈했다.
이 회장이 타던 미 쉐보레 승용차도 인민군 간부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회장의 막내아들(삼남)인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도 이 차를 타고 혜화초등학교를 등하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세운 무역회사인 삼성물산의 서울 자산도 모조리 북한 인민군이 싹쓸이해갔다. 1950년 9월 유엔군 서울을 수복하면서 이 회장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북한에 호되게 당한 이 회장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1951년 남은 여윳돈 3억원을 챙겨서 부산에 삼성물산을 재창업해 무역업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리면서 남은 고철과 탄피를 수집해 일본에 팔았다. 이렇게 마련한 현금으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들여와 적잖은 이익을 남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쟁 와중에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기 어렵다. 당시에 거의 모든 기업인이 망했고, 이들 대부분은 신세 한탄하기에 바빴다. 나머지는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회장은 달랐다. 전쟁을 기회 삼아 끈기 있게 사업을 이어갔다. 부산에서 그가 재기한 배경이다. 당시 3억원으로 시작한 자본금은 1년 만에 50억원을 넘어섰다.1953년 이 회장은 사업을 재구상했다. 무역업에 치중된 사업 영역을 제조업으로 넓히는 방안을 꾀했다. 삼성물산 자본금을 모두 투자해 공장을 짓겠다는 결심도 섰다. 이미 전쟁 와중에 두 번이나 망한 기억이 있다. 언제 인민군과 중공군이 다시 부산까지 쓸고 내려올지 가늠조차 안되던 시점이었다.삼성물산 임원들도 반발했다. 무역업 실적이 좋은 데 굳이 위험을 안고 공장을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하지만 강행했다. 반발을 무릅쓴 이 회장은 1953년 제일제당을 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와 설탕공장을 지었다. 제일제당은 나날이 성장해 공장 생산량이 하루 100t 규모로 성장했다. 연간 346만달러 규모로 전량 수입한 설탕의 생산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인적자원 외에는 없는 한국으로서는 원자재를 수입해 그것을 다양한 품목으로 가공해 수출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라며 "우수한 기술과 생산 시설을 갖춘 제조업 진출은 불가결하다"고 적었다.
제일제당으로 돈을 번 이 회장은 1954년 제일모직으로 섬유 사업에 진출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세를 불린 것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그의 야망에서 비롯했다. 이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국내에서 작은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자본을 축적해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해 선진국 외국과 당당히 맞서 이기는 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고 적었다.일약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발돋움한 그는 평생 저울질한 비료 사업에 진출을 결정했다. 1965년 한국비료공업을 세우고 울산에 비료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듬해 위기가 찾아왔다.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사카린(인공 감미료) 원료 2000여 포대를 건설자재로 속여 들여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이 회장은 1966년 도의적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했다. 한국비료는 이후 삼성에 손을 떠나 공기업으로 탈바꿈했다. 한국비료는 24년 뒤에 다시 삼성그룹으로 복귀하게 된다. 정부는 1994년 공기업 민영화 차원에서 한국비료의 매각을 나섰다. 삼성은 당시 입찰 예상가인 1300억원보다 1000억원이나 웃돈을 얹은 2300억 원에 한국비료를 인수했다. 선친의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의중이 과감한 베팅에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국비료는 얼마 후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바꾼다. 이 회사는 2016년 롯데그룹에 매각돼 롯데정밀화학으로 이름을 재차 변경했다. 주인이 4번이나 바뀐 얄궂은 운명을 겪었다.
이병철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 1974년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을 세우는 등 끊임없이 사세를 불렸다, 198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자산가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퍼즐' 사업을 맞추기 위해 말년에 고군분투했다. 1982년 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서 신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던 '반도체 산업'이었다. HP와 IBM을 찾은 그는 반도체 사업의 구상을 구체화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은 물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는 결심이었다.
→3화에서 계속*이 기사는 ‘재계의 거목 호암 이병철'(조준상 지음), '호암자전'(이병철), '다시 이병철에게 배워라'(이창우), 칩워(크리스 밀러)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