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잃어도 개혁하겠다더니…총선 앞두고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 거론 [연금개혁 파헤치기]
입력
수정
“보험료율을 얼마로 올리겠다는 ‘숫자’ 없는 개혁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정부가 연금개혁을 당장 표 얻는데 쓰는 정치적 도구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윤석열 정부가 이달말 발표 예정인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보험료 인상률 등 구체적인 목표 수치를 담지 않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A교수는 탄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복수의 정부 고위 관계자발로 나온 위 보도에 대해 “확정된 바 없다”며 사실상 논의 사실을 인정했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최소 12% 이상으론 높일 것이란 그간의 예상을 깨고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아우른 구조개혁 방향만 밝히는 수준으로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16일 정부 안팎에서 돈 이야기의 골자다.
10월 말로 예정된 개혁안 발표를 열흘 가량 앞둔 시점에서 흘러나온 이 이야기는 여야가 연금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겠다며 출범시킨 연금특위가 지난 2월 “지금은 모수개혁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다”며 “구조개혁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것과 판박이다.
당시 여야는 내는 돈(보험료율), 받는 돈(소득대체율)과 관련된 모수개혁은 정부 개혁안이 나올 10월 이후에 논의하겠다며 책임을 정부에 떠넘겼다. 이후 8개월이 흘러 발표를 목전에 두고 정부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다.징조는 정부의 연금개혁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 논의 단계에서 일찍이 노출됐다. 작년 11월부터 9개월 간 논의를 거쳐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만든 재정계산위는 당초 최대한 가짓수를 줄인 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8개 시나리오를 병렬적으로 제시해 ‘맹탕 보고서’란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더 받는’ 개혁은 안된다는 다수 위원들의 공감대로 소득대체율 인상안을 배제하면서 위원회가 나름대로 메시지를 던지려 했지만 정부측의 무언의 압박 끝에 최종 보고서엔 소득대체율 인상안이 담겼다.
이 같은 정부의 행보는 그간 윤석열 정부가 밝혀온 연금개혁 방향과는 정반대다. 정부의 연금개혁 방향은 지난해 12월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밝힌 “개혁이란 것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해내야 한다”는 말과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란 발언으로 요약된다.지난 6월엔 이관섭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국민의힘 전국 당협위원장 워크숍에서 “(윤석열 정부) 2년차는 미래를 위해 교육·노동·연금 3대 개혁을 표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 밝히며 의지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지난 6월 국회에 제출할 정부 개혁안을 어떤 식으로 낼지에 대해 “복수안을 내면 정부 부담이 줄지만 반대로 국민에게 선택의 책임을 넘기는 것”이라며 “최대한 (선택지를) 적게 낼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대통령부터 대통령실, 복지부까지 그간의 공언과는 반대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 안팎에선 이 모든 일들이 결국 내년 4월 총선을 바라본 행보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에선 정부가 본격적인 연금 개혁 추진 시점을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연금개혁의 추진 동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 관심사가 연금개혁에서 멀어진 상황에서 보험료율을 높이는 '더 내는' 개혁이 부각될 수 밖에 없는 국민연금 개혁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여든 야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최근 연금 수급 개시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연금개혁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반대 시위와 지지율 하락을 경험한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사례도 정부와 여당의 고민 거리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1기인 지난 2019년 연금개혁을 추진했지만 반대 여론에 부딪혀 무산된 뒤 2022년 재선에 성공하고 나서 재추진에 나섰다. 그럼에도 반대가 커 의회 통과가 불투명하자 지난 3월 의회 표결 없이 정부가 강행 입법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 헌법 조항을 발동하는 '정치적 승부수'까지 던지며 연금개혁을 이뤄냈다.
프랑스 사례가 현 정부에 던지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연금개혁은 확실히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크롱 대통령 또한 재선에 성공한 뒤 연금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이 거론되는 배경엔 이 두 가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현실론에도 윤석열 정부가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을 낼 경우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다는 비판에 부딪힐 전망이다.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은 그간 정부와 여당이 날을 세워 비판해온 문재인 정부의 소위 '사지선다안'보다도 퇴행한 결과다.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개혁의 동력을 얻을 순 있지만,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통령 선거 등 개혁을 미룰 핑계거리는 계속 이어진다. 되려 선거에 질 경우 야당과의 선명성 경쟁으로 개혁안을 들고 나올 수도 있지만 총선에서 진 정부가 국회 표결을 통해 국민연금법 개정이 필요한 연금개혁을 들고 나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다.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회 등 정치권에서 합의가 실종된 상황에서 내년 총선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게 됐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미래 세대를 위해 정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연금개혁까지도 선거 앞에선 표심 잡기 수단으로 의미가 변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윤석열 정부가 이달말 발표 예정인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보험료 인상률 등 구체적인 목표 수치를 담지 않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A교수는 탄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복수의 정부 고위 관계자발로 나온 위 보도에 대해 “확정된 바 없다”며 사실상 논의 사실을 인정했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최소 12% 이상으론 높일 것이란 그간의 예상을 깨고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아우른 구조개혁 방향만 밝히는 수준으로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16일 정부 안팎에서 돈 이야기의 골자다.
10월 말로 예정된 개혁안 발표를 열흘 가량 앞둔 시점에서 흘러나온 이 이야기는 여야가 연금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겠다며 출범시킨 연금특위가 지난 2월 “지금은 모수개혁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다”며 “구조개혁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것과 판박이다.
당시 여야는 내는 돈(보험료율), 받는 돈(소득대체율)과 관련된 모수개혁은 정부 개혁안이 나올 10월 이후에 논의하겠다며 책임을 정부에 떠넘겼다. 이후 8개월이 흘러 발표를 목전에 두고 정부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다.징조는 정부의 연금개혁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 논의 단계에서 일찍이 노출됐다. 작년 11월부터 9개월 간 논의를 거쳐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만든 재정계산위는 당초 최대한 가짓수를 줄인 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8개 시나리오를 병렬적으로 제시해 ‘맹탕 보고서’란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더 받는’ 개혁은 안된다는 다수 위원들의 공감대로 소득대체율 인상안을 배제하면서 위원회가 나름대로 메시지를 던지려 했지만 정부측의 무언의 압박 끝에 최종 보고서엔 소득대체율 인상안이 담겼다.
이 같은 정부의 행보는 그간 윤석열 정부가 밝혀온 연금개혁 방향과는 정반대다. 정부의 연금개혁 방향은 지난해 12월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밝힌 “개혁이란 것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해내야 한다”는 말과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란 발언으로 요약된다.지난 6월엔 이관섭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국민의힘 전국 당협위원장 워크숍에서 “(윤석열 정부) 2년차는 미래를 위해 교육·노동·연금 3대 개혁을 표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 밝히며 의지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지난 6월 국회에 제출할 정부 개혁안을 어떤 식으로 낼지에 대해 “복수안을 내면 정부 부담이 줄지만 반대로 국민에게 선택의 책임을 넘기는 것”이라며 “최대한 (선택지를) 적게 낼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대통령부터 대통령실, 복지부까지 그간의 공언과는 반대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 안팎에선 이 모든 일들이 결국 내년 4월 총선을 바라본 행보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에선 정부가 본격적인 연금 개혁 추진 시점을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연금개혁의 추진 동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 관심사가 연금개혁에서 멀어진 상황에서 보험료율을 높이는 '더 내는' 개혁이 부각될 수 밖에 없는 국민연금 개혁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여든 야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최근 연금 수급 개시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연금개혁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반대 시위와 지지율 하락을 경험한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사례도 정부와 여당의 고민 거리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1기인 지난 2019년 연금개혁을 추진했지만 반대 여론에 부딪혀 무산된 뒤 2022년 재선에 성공하고 나서 재추진에 나섰다. 그럼에도 반대가 커 의회 통과가 불투명하자 지난 3월 의회 표결 없이 정부가 강행 입법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 헌법 조항을 발동하는 '정치적 승부수'까지 던지며 연금개혁을 이뤄냈다.
프랑스 사례가 현 정부에 던지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연금개혁은 확실히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크롱 대통령 또한 재선에 성공한 뒤 연금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이 거론되는 배경엔 이 두 가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현실론에도 윤석열 정부가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을 낼 경우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다는 비판에 부딪힐 전망이다.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은 그간 정부와 여당이 날을 세워 비판해온 문재인 정부의 소위 '사지선다안'보다도 퇴행한 결과다.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개혁의 동력을 얻을 순 있지만,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통령 선거 등 개혁을 미룰 핑계거리는 계속 이어진다. 되려 선거에 질 경우 야당과의 선명성 경쟁으로 개혁안을 들고 나올 수도 있지만 총선에서 진 정부가 국회 표결을 통해 국민연금법 개정이 필요한 연금개혁을 들고 나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다.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회 등 정치권에서 합의가 실종된 상황에서 내년 총선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게 됐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미래 세대를 위해 정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연금개혁까지도 선거 앞에선 표심 잡기 수단으로 의미가 변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