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 지키려 백인들이 써먹은 이것… 바로 '스토리텔링' [책마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현정 옮김
원더박스
568쪽
2만7000원
2018년 12명의 태국 소년이 물이 찬 동굴에 갇혔다. 이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퍼지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소년들을 응원했다. 반면 같은 해 예멘 내전 중 굶주림으로 사망한 5세 미만의 어린이 8만5000명은 훨씬 적게 보도가 됐다. 아이들은 세계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태국 소년들의 구출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예멘 어린이들 사건은 상징적인 개별 사건이 없었고 저널리즘적 연출이 불가능했다. ‘구원’의 서사가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경쟁, 복수, 사랑, 구원 등과 같은 서사 구조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 전쟁, 뉴스, 교육, 광고 등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허구든 사실이든 정보가 교환되고 퍼지는 곳에 서사 구조가 발견된다.

독일 칼럼니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작동해왔는지 탐구한다. 선사시대 부족부터 성경, 그리스 신화, 구텐베르크 인쇄술, 할리우드 영화까지 스토리텔링이 세상에 끼친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영향을 추적한다.
버밍엄대 연구진은 6000여 편의 영화를 분석한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의 여섯 가지 서사 유형이 있다고 밝힌다. 가난뱅이가 백만장자가 되는 이야기, 주인공이 끝없이 추락하는 이야기, 구덩이에 빠졌다가 탈출하는 이야기, 한참 상승한 후에 추락하는 이카로스 이야기, 고난 속에서 성공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처음에는 강한 타격을 받았다가 중간에 상승하지만 결국 비극을 맞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다. 사람들은 대체로 비극보다 해피엔딩 구조를 선호했다고 연구진은 전한다.정치인들과 일부 기업인들은 서사를 활용해 내러티브 전쟁에 뛰어든다. 서구 백인들은 과거부터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다른 인종을 지배해 문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구원’ 서사를 퍼뜨렸다. 나치는 중세부터 내려온 ‘사악한 유태인’ 이야기를 활용했다.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회사는 바나나 수출을 독점하기 위해 과테말라 정부를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다.

이야기는 현실을 왜곡하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현대에는 미디어의 발달로 수많은 이야기로 인한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고 타인의 이야기가 자아를 지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혼란한 세상에서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최종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