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체 모를 기호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걸까... 리암 길릭의 예술세계

갤러리바톤 리암 길릭 개인전
‘변화의 주역들’ 11월 11일까지
미술관 벽에 기호들이 한가득 붙었다. 설치작품마다 세트처럼 하나씩 붙어있는 말풍선. 풍선 속 기호들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내는 신호 같다. 영국 작가 리암 길릭(59)이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연 세 번째 개인전 ‘변화의 주역들’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지난 200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리암 길릭은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미술관,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에서 작품을 소장 중인 세계적 설치미술가다. 2021년에는 광주비엔날레를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30년을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며 국내 미술 애호가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국내에서 열리는 세 번째 전시이지만, 이번 전시는 조금 더 특별하다. 길릭이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이 많아서다. 길릭은 이번 개인전을 위해 특별히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구조물과 빛이 중심이 된 ‘라이팅 부조’ 시리즈와 평면 작품 7점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
백색 조명을 받고 있는 알루미늄들은 마치 형광등, 혹은 기계 부품처럼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육각형 구조를 띄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육면체의 이름은 ‘티 슬롯’. 길릭은 현대 제조산업을 오랜 기간 파고들며 이 ‘티 슬롯’이 제조 현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부품이란 걸 알게됐다. 그 부품들에 백색광을 더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산업 부품과 빛의 조합을 통해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등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산업 시대의 예술을 고안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 옆에 그린 말풍선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다. 길릭이 1920년 독일에서 처음 나온 '아이소타이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아이소타이프는 당시 다양한 정보를 문자 대신 그림으로 시각화한 그림 기호다. 현장에서 만난 길릭은 “아이소타이프를 처음 접한 뒤 ‘이런 고전적 기호들을 빛, 실크스크린 등 현대기술과 조합해보면 어떨까?’란 고민을 거듭했다”고 말했다.육각형의 구조물 ‘티 슬롯’을 이용한 작업은 베테랑 조각가인 길릭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가 기존에 해왔던 작업방식이 더이상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각형, 사각형 등 고전적 도형이나 직선 곡선에 현란한 색을 입히고, 그 옆에 텍스트를 조합하는 작업 방식을 고수해 온 작가다. 그는 특히 무엇보다 텍스트와 색감을 강조한 작품들을 주로 내놨다.

하지만 산업 구조물인 티 슬롯은 그에게도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였다. 현란한 색을 입히기는커녕 직선으로 배열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백색광이다. 그는 색 대신 뒤에 조명을 배치해 구조물에 무게감을 부여하며 갤러리 벽면과 상반된 느낌을 창조했다.
자주 사용하던 텍스트 대신에는 아이소타입으로 구현한 기호를 선택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업 과정과 의미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이 아이소타입을 캔버스 위로 옮긴 페인팅 작품 7점도 선보였다. 이 작품이 그가 1987년 이후 처음 내놓은 페인팅이다. 모두 이번 개인전을 위해 준비했다. 길릭은 “이 아이소타입 기호의 최적의 모양을 찾기 위해 몇 백번이고 계속 써봤다”며 “마치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는 과정과도 같았다”고 했다.그는 이 알 수 없는 기호들을 통해 산업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앞에 설치한 육면체 구조물을 통해 산업 사회를, 그리고 말풍선 속 기호를 통해 예술가의 언어를 표현한 것이다. 예술적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했던 아이소타입의 원래 목적과 반대로, 길릭은 정보 전달을 위해 만들어진 기호를 다시 예술로 승화시켰다.
공들여 그렸다면서도 잘 보이지 않게 그렸다. 7점 다 그렇게 그렸다. 작품을 만들 때 최소한의 잉크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포영화에서 차 안에 갇힌 사람이 유리에 입김을 불어 구조 신호를 쓰는 데서 영감을 얻었다”며 “다급한 신호처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하나의 기호’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길릭은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갤러리바톤 전시장의 평면도를 3D 모델로 받아 갤러리 구조에 맞게 작품을 배치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현장에 있는 빔, 조명, 책장까지도 다 디지털 모델로 만들며 갤러리의 배치와 레이아웃을 연구했다. 그는 “내 작업의 시작은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까 연구하는 것”이라며 “각각의 작품이 받는 빛과 현장 조명까지 모두 꼼꼼히 계산한다”고 말했다.길릭은 "서울은 내게 특별한 도시"라고 했다. 14년 전 처음 서울을 찾았을 때 독특한 건축물과 구조물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을 찾은 대다수 작가들은 자기 작품만 보여주고 돌아가지만, 나는 서울을 공부하고 서울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전시는 11월 11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