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생존 기로에 선 문래동 마치코바

이정선 중기선임기자
일본 도쿄 오타구(大田區)엔 고도의 기능을 갖춘 숙련공들이 일하는 4000여 개의 마치코바(町工場·영세 공장)가 있다. 오타구의 마치코바가 2016년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100여 개 마치코바가 협업해 봅슬레이를 개발하면서다. 0.1초 이내로 승부가 갈리는 봅슬레이는 첨단 소재와 정밀기술이 필요해 페라리, 맥라렌 등 슈퍼카 제조사가 독점하는 분야였다.

오사카 인근의 마치코바 밀집 지역 히가시오사카에서도 항공기 및 우주선 부품을 가공하는 마치코바가 힘을 합쳐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일본 소공인들의 축적된 기술력과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한국에도 이런 지역이 있다. 서울 문래동 기계금속단지다. 문래동 1~4가 일대에 1279개의 마치코바가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영세 소공인이지만 길게는 50년 이상 쌓은 금속 장인들의 기술력만큼은 최고 수준이다.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자부심이다.

탱크도 만드는 기술력 축적

문래동 마치코바는 국내 제조업의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다. 기계 부품, 방위산업용품, 자동차부품 등의 금속가공에 필요한 선반 밀링 보링 열처리 그라인딩 후처리 등 모든 공정이 여기서 이뤄진다. 소재만 확보되면 어떤 부품도 2~3일 안에 만들어낸다. 수많은 마치코바가 사실상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횡적 네트워크 생태계가 구축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래동은 국내에서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대량생산 위주의 반월·시화나 남동 국가산업단지 등에서는 이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도시 제조업의 마지막 보루인 문래동에서 쇠를 깎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개발 압력에 내몰리고 있어서다. 수년 전부터 재개발 후보지로 거론되던 문래동 1~4가는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 문래동 4가는 이미 재개발 조합설립인가를 마쳤다. 임대료도 2~3배 뛰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기는 부동산 투기꾼들이 문래동을 먹잇감으로 삼으면서 허름한 공장 사이로 MZ세대 취향의 피자집과 펍 등이 밀려들고 있다. 90% 이상이 임차공장인 영세 소상인들이 버티기 어려운 구조다.

생태계 유지 정부가 나서야

문래동 마치코바의 생태계는 이미 깨지고 있다. 문래동 1가의 도금단지가 통째로 매각되면서 소공인들은 부천이나 김포 등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마치코바 수도 10년 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영등포구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 문래동 1~4가 마치코바의 ‘통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소공인 산단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용역도 발주했다. 연말께 서울 근교 등을 대상으로 한 이전 후보지 윤곽이 나올 전망이다. 그러나 구청 차원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도권에 문래동 규모(약 10만 평)만 한 터를 찾기 어려운 데다 첨단업종을 선호하는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국회는 물론 서울시, 경기도,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이 모두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수십 년의 암묵지가 쌓인 문래동 마치코바가 사라지면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