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공공의 실패와 각자도생

재난 충격 잊어도 교훈은 살려야
공공 안전망 시민 신뢰 재건 절실

이관우 편집국 부국장
당신은 20대 남자. 지하철 6호선을 탄다. 좌석 7개 중 3개가 비어 있다. 남과 남, 여와 남, 여와 여 사이다. 어디에 앉는 게 좋을까. 눈 밝은 이라면 당연히 여와 여 사이다. 여성의 평균 어깨너비는 남성보다 6㎝가량 작다. 불편함이 길러낸 찰나의 직관, 생활의 지혜다.

서울지하철이 등장한 1974년 좌석 너비는 435㎜였다. 이걸 2호선 등 일부 노선에서 480㎜로 키우고 좌석을 6개로 줄인 게 5년 전쯤의 일이다. 달라진 승객의 체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편 민원이 해를 거듭하며 쌓이자 결국 1인당 공간을 넓힌 것이다. 반뼘도 안 되는 좌석 확장에 40년 넘게 걸렸다. 성인 남녀 신체는 같은 기간 ‘종족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커졌다. 남자 키가 평균 10.2㎝, 몸무게는 15.3㎏ 이상 불었다. 여성도 키와 몸무게가 각각 4.4㎝, 5.7㎏ 늘어났다.민간은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한다. 패션, 사무기기, 자동차, 주택 등 어느 시장이든 정확한 고객 읽기에 생존이 달렸다. 변화무쌍한 신체 사이즈에 맞춰 크기가 조절되는 자동차 트랜스포머 시트가 등장한 지 오래다. 오히려 세그웨이(1인용 이동장치), 일회용 산소 캡슐처럼 변화를 너무 앞서 나가다 쪽박을 찬 제품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도 시장은 끊임없이 고객의 변화에 촉수를 댄다.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넌의 통찰대로, 공공도 제 이익을 우선하는 탓일까. 변화에 둔감한 공공이 정치를 잘못 만나면 화(禍)가 증폭된다. 교통 수요 예측에 실패한 ‘김포 골병라인’이나 9호선의 숨 막히는 출근 전쟁이 그런 예다. 정치 이기와 행정 편의가 꼬이고 뒤엉켜 개통 전부터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밀집된 지하철 안에서 선 채로 기절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나서야 급행버스 증차 같은 뒷북 대책으로 숨통을 텄다.

정치의 속성이야 원래 그렇다 쳐도, 손안에 든 기술 변화를 못 따라가는 건 퇴행이다. 낡은 규제 틀에 갇혀 확장이 더딘 폐쇄회로TV(CCTV)만 해도 그렇다. 과거엔 무고한 시민의 사생활이 노출돼 개인정보 침해가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동형암호(homomorphic encryption) 기술로 암호화 처리가 가능해진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암호화한 정보로 무고한 시민의 얼굴은 감추고, 흉악 범죄자 검거 등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만 추출해 쓸 수 있다. 사생활도 지키고, 범죄 피해도 예방할 ‘윈윈’의 새 길이 진작부터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산책길에서의 여교사 살해 등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고 나서야 기술의 존재에 새삼 눈길을 돌린다.재난의 기억은 대개 새로운 재난으로만 소환된다. 대구지하철,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가 그랬다. 충격과 공포는 잊혀야 사람이 산다. 위험한 것은 피 흘려 얻은 교훈이 잊힐 때다.

공공의 가치는 재난으로 증명된다. 시민의 불안은 여전하다. 원인과 책임 규명, 재발 방지라는 공공 기능이 또다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신에서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난다면? 차라리 각자도생이 안전하지 않겠느냐고 푸념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건 이미 공공 실패의 징후다.

대형 재난은 터지기 전 징조를 보인다고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지적한 게 1931년, 거의 100년 전 일이다. 300번의 사소한 사고, 29번의 경미한 부상 사고가 1개의 대형 참사로 연결된다는 이른바 ‘1:29:300 법칙’이다. 이태원 참사 1주기가 곧 돌아온다. 우리 일상은 정말 안전해졌는가. 징후는 반드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