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생명을 불어넣은 '착시'...韓·이탈리아 거장의 시대를 초월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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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 마졸레니 -까르띠에, 프라다, 발렌티노….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이 모여있는 영국 런던의 올드 본드 스트리트. 화려한 명품 매장 사이를 걷다 보면 갤러리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마졸레니 갤러리다.
韓 기하추상 선구자 이승조
伊 실험미술 거장 보날루미
런던에서 시대 초월한 만남
갤러리 안에 들어가면 두 눈을 의심할 만한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평평한 캔버스가 3차원으로 일렁이고, 캔버스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딱딱한 플라스틱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다.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두 작품은 사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든 것. 캔버스가 볼록 튀어나와 보이는 검은색 작품은 한국 작가 이승조(1941~1990)의 '핵' 시리즈, 캔버스가 날카롭게 튀어나온 흰색 작품은 이탈리아 작가 아고스티노 보날루미(1935~2013)의 '비앙코' 시리즈다. 전세계 '미술 큰손'과 갤러리스트 등 VIP들이 한데 모이는 '프리즈 런던' 기간에 한국의 국제갤러리와 이탈리아 마졸레니 갤러리가 그 나라 거장을 세계 무대에 알리기 위해 함께 기획했다.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도, 이야기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평평한 캔버스에 입체적인 생명을 부여했다. 전시 제목을 ‘근접성의 역설’(Paradox of Proximity)로 정한 이유다.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탈리아의 유명 큐레이터 마르코 스코티니는 "이승조는 파이프를 통해, 보날루미는 ‘엑스트로 플렉션’이라는 기법을 통해 캔버스를 입체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지평을 공유했다"며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고 했다.입체성 외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화려한 색깔을 쓰기보다 '단색'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전시장에선 검은색의 이승조 작품과 흰색의 보날루미 작품이 대비를 이루며 서로를 마주한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만남이다.
국제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이승조를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내놓을 계획이다. 스코티니는 "서양에 잘 알려진 한국 거장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의 숨겨진 작가들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런던=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