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란트의 국립심포니, '마이어'라는 훈풍을 만나다 [클래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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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심포니 245회 정기연주회첫 곡인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매우 안정적인 연주였다. 두터움과 깔끔함의 균형이
오보이스트 알브레히트 마이어 협연
따뜻한 음색으로 정갈한 연주 선보여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에선
호방함 부족했으나…정밀한 앙상블로 상쇄
좋았고, 템포와 표현 등이 전체적으로 적절했다.
두 번째 순서인 엘가의 ‘오보에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독백’에서 오보에 독주를 맡은 사람은
알브레히트 마이어였다. 그는 1992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오보에 수석으로 입단한
뒤 지금까지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적인 스타 연주자인 그는 내한공연을 가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은 이제
외국인 연주자에게서 듣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게 됐지만, 그는 이 말을 하고 난 뒤에도 계속
어색하게나마 한국어로 이야기했다.이 공연에서 엘가의 ‘독백’은 슈트라우스의 협주곡에 대한 전주곡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독백’ 연주가 끝난 뒤에는 박수를 치지 말고 협주곡이 끝난 다음에 쳐 달라는 취지의 당부였다. 한국어를 알 리 없는 외국 연주자가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 접하는 경험이었다. 청중의 무분별한 박수로 좋은 연주를 듣고도 기분을 잡친 경험이 근래에 몇 번 있었기에 마이어의 간곡한(!) 당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좀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그의 정성이 어느 정도는 통했는지 연주가 끝난 뒤에 (첫 곡과는 달리) 박수가 좀 성급하게 터진 감은 있었지만 중간 박수는 없었다.
엘가의 ‘독백’은 전원 풍경을 연상케 하는 오케스트라의 배경 위로 오보에가 종달새처럼 조용히 날아다니는 느낌의 연주였다(그렇다, 연주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이 떠올랐다).곧바로 이어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보에 협주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말년의 걸작
중 하나이자 그 무렵 작곡가가 추구했던 고전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
적으로 화사하면서도 정갈한 연주였으며, 알브레히트 마이어 특유의 따스한 음색이 곡에 잘
녹아들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이어가 입고 온 붉은 무늬의 상의 역시 연주와 무척 잘 어울
려, 설마 이런 점까지 감안한걸까 싶었다. 마이어는 앙코르로 바흐 칸타타 ‘내 마음에 근심이
많도다’ 중 ‘신포니아’를 악장을 비롯한 현악 5부 수석과 함께 연주했는데, 이 역시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주였다.이날 공연의 제목은 협연자를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이게도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
곡’이었다. 마이어 같은 거물 연주자와 협연할 경우 대개는 ‘알브레히트 마이어의 슈트라우스’
같은 제목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공연 후반부에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
지와 자존심의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과연 그럴 만한 연주였다. 1부에서 마이어를 두드러지
지는 않지만 충실하게 뒷받침했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
주곡’에서 더욱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1악장 초반에는 각 성부를 너무 신중하게 나눈 나머지 약간 통일성이 부족하게 들리기도 했으나 악장 중반쯤에는 이 문제도 해결됐다. 전체적으로 매우 세심하고도 정성스런 연주였으며, 각 파트의 분업과 협업이 거의 모범적인 수준으로 이뤄졌다. 피날레인 5악장만큼은 파트 간 연계가 느슨하거나 반대로 치밀함에 치우친 나머지 호방함이 부족한 대목도 더러 있긴 했으나, 성대한 마무리가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앙코르로는 쇼스타코비치의 ‘등에, Op. 97a’(‘귀찮은 놈’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중 ‘민속축제’를 연주했는데, 이 역시 작곡가 특유의 ‘뻔뻔함’이 살짝 아쉽긴 했지만 정밀한 앙상블이 만족감을 주었다.
2022년 1월에 제7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다비트 라일란트의 예술관이 오케스트라를 순조롭게 발전시키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공연이었다.
황진규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