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에 깃발 꽂는다…글로벌 존재감 키우는 韓 VC [긱스]

해외 보폭 늘리는 벤처캐피털

해외투자 비중 20%로 3년來 최고
한투파·해시드, 해외펀드 조성중
KB·우리·신한 VC도 적극 행보

젊은 유학파 출신 운용역 늘며
美 톱티어 VC와 긴밀한 협력
펀드 공동운용으로 현지 진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투자 혹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벤처캐피털(VC)업계가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주요 VC는 해외투자 실적을 기반으로 줄줄이 신규 펀드 출시에 나섰다. 미국과 싱가포르 등에 신규 오피스를 열고, 해외 VC에 출자자로 나서거나 공동운용(Go-GP) 방식으로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졌던 글로벌 VC 시장에서 ‘K벤처’가 존재감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내년 해외펀드 줄줄이 출시

18일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VC가 해외에 집행한 투자액은 4562억원으로, 총투자액의 20.7%를 차지했다. 비중으로 따지면 2020년(21.3%) 후 가장 높다. 상반기 가장 많은 해외 투자를 집행한 곳은 미래에셋벤처투자다. 40개 그룹사 해외사무소를 활용해 생성형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코히어와 AI 광고 솔루션 기업 몰로코, 중고 명품시계 거래 플랫폼 ‘크로노24’ 등에 투자했다.
그래픽=허라미 기자
내년 글로벌 펀드 출시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미국, 중국, 싱가포르 본부를 두고 있는 한국투자파트너스는 지난 7월 6000만달러(약 800억원) 규모 동남아시아 펀드를 만든 데 이어 내년 상반기 미국에 투자하는 블라인드 펀드를 조성할 예정이다.

블록체인 및 웹 3.0 분야에 투자하는 해시드벤처스는 2020년 1200억원 규모 1호 펀드, 2021년 2400억원 규모 2호 펀드에 이어 내년 초 3호 펀드 결성을 앞두고 있다. 해시드는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와 공동으로 지식재산권 인프라 개발사 스토리프로토콜에 5400만달러(약 712억원) 규모 투자를 집행하기도 했다. 2021년 국내 민간 자본 최초로 기후테크 펀드를 조성한 인비저닝파트너스는 최근 한국성장금융과 싱가포르 테마섹 자회사인 파빌리온캐피털로부터 출자받아 새로운 펀드를 조성 중이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투자를 시작한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버텍스벤처스와 오픈스페이스벤처스가 조성한 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동남아시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일본 DNX벤처스에도 출자할 계획이다. 글로벌 헬스케어 펀드를 운용 중인 파트너스인베스트먼트는 제너레이트바이오메디슨, 살리오젠 등 해외 유망 바이오기업에 선제적으로 투자했다.

금융지주 VC·CVC 앞다퉈 해외로

금융지주 계열 VC도 경쟁적으로 해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KB인베스트먼트는 2019년 선보인 2200억원 규모 글로벌 플랫폼펀드 1호 실적에 힘입어 올해 2500억원 규모로 2호 펀드를 결성했다. 스위스 바이오 기업 아벨테라퓨틱스에 투자한 지 2년 만인 2021년 50% 수익률로 회수에 성공하기도 했다. 동남아·인도에선 현지 VC와 공동운용 방식을 이어가고, 미국은 올해 설립한 보스턴 지사에서 전용 펀드를 결성해 직접 투자한다는 전략이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3월 우리금융그룹에 인수된 이후 1000억원 규모 글로벌펀드 결성에 나섰다. 국내 최초로 미국과 중국 오피스를 개설한 이력이 있는 이 VC는 8월 싱가포르 지점을 새로 열며 동남아 투자 강화에 나섰다. 신한벤처투자는 올초 동남아 및 미국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2000억원 규모 글로벌플래그십 펀드를 조성한 데 이어 국내 최초로 결성한 일본 역외펀드를 내년 최대 600억원 규모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하나벤처스는 해외 전용펀드는 없지만, 국내 펀드를 통해 10개 해외 기업에 투자했다. 미국 타파스미디어에 투자해 열 배로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도 그룹 계열사와의 시너지 등을 겨냥해 해외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롯데벤처스는 2021년 베트남 법인에 이어 올 8월 미국 실리콘밸리 지사를 설립했다. 연내 베트남 펀드 결성을 앞두고 있으며 주로 미국 2차전지, 헬스케어 기술 기업에 투자하는 벤처펀드도 내년 조성할 예정이다. 한화자산운용은 미국 VC와 공동운용 방식으로 200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큰손’ 자금력으로 존재감 커져

국내 VC의 해외 진출 러시에는 국내 벤처업계 ‘큰손’의 지원사격도 한몫했다. 김종현 한국투자파트너스 싱가포르법인장은 “모태펀드와 산업은행 등이 동남아 VC가 운용하는 펀드에 출자를 많이 하면서 한국 벤처 자금에 대한 인지도가 커졌다”고 말했다. 한국벤처투자는 올 상반기에만 해외 VC 글로벌 펀드에 6287억원을 출자하며 해외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2019년과 2021년 잇달아 2억달러(약 2709억원), 3억달러(약 4050억원) 규모 벤처그로스펀드를 결성하며 큰손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성장금융도 첫 글로벌 이노베이션 펀드를 결성한다. 스파크랩파트너스-앤틸캐피털, IMM인베스트먼트 글로벌 등 총 6곳이 운용사 선발전에 출전했다.

업계에 젊은 해외 유학파가 늘면서 미국 ‘톱티어’ VC와의 긴밀한 협력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다. 실리콘밸리 기반 VC인 a16z는 이달 국내에서 심포지엄을 열며 첫 공개 행보를 보였다. 최경국 힐스프링인베스트먼트 파트너의 인맥으로 이번 행사가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이진수 신한벤처투자 상무는 “5년 전만 해도 ‘미국 톱티어 VC는 만날 수도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인맥이 탄탄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늘면서 달라졌다”며 “미국 VC도 투자 기업의 고객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아시아 시장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허란/김종우 기자 why@hankyung.com